역사는 때론 가장 가까웠던 이들을 가장 잔인하게 갈라 놓는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그 극적인 예다. 오늘날 서로를 향해 미사일을 겨누는 이란과 이스라엘, 이 두 국가는 마치 태생부터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적(敵) 같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협력과 우호의 순간들이 훨씬 많았다. 반전된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이 끝없는 적대의 고리를 누가 먼저 끊어낼 수 있을까.

◆고대 페르시아, 유대인을 품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인연은 고대 중동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조(朝) 페르시아의 창시자 키루스 대왕은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를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키루스 대왕은 기존의 정복자들과 달리 피정복민에 대한 관용 정책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바빌론에 입성하면서 포로 신세였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켰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복귀시키고 재정까지 지원해 성전을 재건하도록 했다. 유대인들은 이를 구약성경 에즈라기 6장, 이사야서 45장에 기록했다. 이는 유대인 역사에서 유일하게 이방 통치자가 찬양의 대상이 된 사례다.

이후에도 페르시아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관대했다. 문화적 자율성과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서기 224~651년) 시기에는 유대 율법학과 탈무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중세에 들어서도 이러한 흐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유대인 공동체들은 계속 존속했다. 이들은 상업과 학문,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사회와 공존했다. 오늘날에도 대다수 유대 역사학자들은 페르시아를 디아스포라 초기의 ‘안식처’로 평가한다.

이처럼 고대에서 중세까지 이란은 유대인들에게 망명의 땅이 아니라, 우호의 땅이었다.

◆팔레비 왕조 시절엔 ‘형제’

1951년 이란의 모사데크 정부가 영국이 장악해온 이란 석유 자원을 전격적으로 국유화하자, 미국은 영국과 함께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고 친서방 팔레비 왕조를 앉혔다. 미국의 중동 전략에 따라 팔레비 왕조는 이스라엘, 튀르키예와 함께 비아랍권 3각 협력 체제를 형성했다.

팔레비 국왕은 아랍의 반이스라엘 정서에서 거리를 두었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통해 석유를 안정적으로 수급받았다. 특히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이후에는 석유의 상당 부분을 이란에서 수입했다. 양국은 이란산 석유를 지중해를 거쳐 유럽을 수출할 수 있는 송유관·항만 시설을 운영하는 합작회사도 운영했다. 이스라엘의 국방산업은 이란의 자금과 석유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통해 서방 무기체계와 군사 기술에 쉽게 접근했다. 양국 관계가 절정기였던 1970년대 후반에는 ‘플라워’(flower)란 명칭의 탄도미사일 공동 개발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이스라엘이 기술을 제공하고, 이란은 자금과 시험 장소를 제공하는 식으로 협력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이란의 정보기관 사바크는 공산주의 세력 감시와 내부 반체제 인사 탄압에 협력했다. 이렇게 양국은 군사, 정보, 경제 부문에서 긴밀히 연대했다. 당시 양국은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다.

◆이슬람 혁명, 모든 것을 뒤엎다

양국 관계는 1979년 완전히 바뀌었다. 팔레비 왕정의 부패와 독재, 극심한 빈부 격차에 지친 이란 국민들은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이슬람 혁명을 일으켰다.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은 왕정을 뒤엎고 신정 체제를 수립했다.

이후 이란의 외교 노선은 완전히 재편됐다. 미국을 ‘대사탄’(Great Satan), 이스라엘을 ‘소사탄’(Little Satan)으로 규정한 호메이니 정권은 이스라엘과의 모든 외교·경제 관계를 단절했다. 적대 관계로 돌변한 것이다. 동시에 이란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무장 투쟁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란의 노선은 단순한 반유대주의 차원이 아니었다. 시아파 이슬람의 종교적 세계관과 반서구 민족주의, 그리고 혁명적 반제국주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란은 가자지구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지하드를 지원하며 ‘반이스라엘 전선’을 구축했고, 이는 이스라엘 안보에 실질적인 위협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화해의 걸음, 누가 먼저 내디딜 것인가

1990년대 이후 중동 질서는 탈냉전과 함께 복잡해졌다. 이란은 핵개발을 본격화했고, 이스라엘은 이를 생존의 위협으로 간주했다. 양국은 직·간접적 충돌을 이어갔다. 특히 시리아 내전 이후 양국의 군사적 긴장은 한층 높아졌다.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는 이란과, 이를 견제하려는 이스라엘은 수 차례 충돌을 벌였다.

게다가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고도화되면서 이스라엘의 위기감도 급격히 높아졌다. 이란은 국제사회와의 핵합의(JCPOA) 이행 중단 이후 고농축 우라늄 생산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핵무기 개발에 근접한 수준의 농축 활동도 감행했다.

이에 이스라엘의 군사적 대응 가능성은 커졌다. 이스라엘은 중동 유일의 핵보유국이다. 이를 통해 역내에서 전략적 우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이스라엘의 군사적 독점 지위는 무너진다. 결국, 2025년 6월 이스라엘과 이란은 직접적인 군사충돌에 이르게 됐다. 이 충돌은 중동 질서를 다시 그리면서, 과거 형제국이었던 두 나라가 이제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자리 잡았음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역사가 증명하듯, 적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친구는 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오늘의 적대가 미래까지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변화를 만드는 것은 힘이 아니라, 먼저 결단하는 용기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자가 역사를 바꾼다.

박영서 논설위원(py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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