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뮤지엄 산' 내 조각거장 '안토니 곰리' 상설관
햇빛·바람·관객… 한 공간서 어우러진 작품 7점
곰리 "인공지능, 인간의 촉촉한 두뇌 대체할 수 없어"

조각 거장 안토니 곰리가 19일 강원 원주 뮤지엄 산의 상설관 그라운드에서 작품 옆에 앉아 있다. 뮤지엄 산 제공
조각 거장 안토니 곰리가 19일 강원 원주 뮤지엄 산의 상설관 그라운드에서 작품 옆에 앉아 있다. 뮤지엄 산 제공


강원도 원주 월송리 오크밸리 리조트 경내에 있는 미술관 '뮤지엄산(SAN)'. 원형의 판테온을 딴 반구형 공간에 영국의 세계적 조각 거장 안토니 곰리(75)가 바닥에 앉아 입구를 바라본다. 아득한 산의 푸른 능선들과 붉은 인체 조각들이 서 있거나 웅크리거나 누워있다. 몇몇 관람객들은 조각의 모습을 따라 앉거나 등을 바닥에 대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하늘을 향해 뚫린 돔의 개구부로 빛이 떨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빛은 바닥을 스치듯 이동한다. 조각과 그림자의 경계가 흔들린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 내 안토니 곰리 상설관 '그라운드'. 김나인기자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 내 안토니 곰리 상설관 '그라운드'. 김나인기자


안토니 곰리와 일본 건축 대가인 안도 다다오(83)가 협업해 만든 첫 공간인 뮤지엄 산 내 상설관 '그라운드'(GROUND)의 모습이다. 뮤지엄 산 플라워 가든 지상의 입구로 들어와 나선형 44개의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면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공간에 들어서기 전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옵저베이션 룸'이다.

'그라운드'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옵저베이션 룸'. 밖으로는 산이 보인다.  김나인기자
'그라운드'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옵저베이션 룸'. 밖으로는 산이 보인다. 김나인기자


◇ 웅크린 조각, 엎드린 몸… 지구와 호흡하는 7개 조각 = 내부 직경 25m, 천고 7.2m, 직경 2.4m 크기의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태곳적 '동굴' 내부에 웅크려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주변의 산과 나무, 빛을 조망할 수 있다. 안토니 곰리의 '블록워크(Blockworks)' 시리즈 중 인체 형상을 딴 7점의 조각이 곳곳에 흩어졌다. 철로 만든 조각들은 서 있거나 앉아있고 허리를 굽히고 누워있다. 바닥을 껴안듯, 땅을 믿듯 조용히 체중을 싣는다.

지난 19일 전시장 개관을 기념해 열린 퍼포먼스는 곰리의 '장소 특정적 예술'로의 공명을 도왔다. 전위무용가 홍신자와 생황 연주자 김효영이 연주와 몸짓을 더한 퍼포먼스로 관람객들을 향해 "앞으로 나오라"며 참여를 끌어냈다. 곰리의 조각은 장소 속에 들어가 장소의 의미와 역사를 환기시킨다. 손을 잡고 이끌려온 관객들은 조각 옆에서 눕고 고개를 숙이며 내면과 소통한다. 여름날 해변이나 잔디에 누워 명상하듯, 아기가 엎드려 누워있듯, 지구의 땅에 엎드려 있는 조각들은 인류가 지구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의 안토니 곰리 상설관 '그라운드'. 천장의 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은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자리를 옮긴다. 김나인기자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의 안토니 곰리 상설관 '그라운드'. 천장의 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은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자리를 옮긴다. 김나인기자


"관람자와 작품이 나뉘지 않고 하나의 공간 안에서 어우러졌어요. 이건 마법 같은 순간입니다. 단순히 7점의 조각보다 정지된 고요한 7개의 공간을 만들어 관람자가 멈춰서 몸과 자기 자신을 사유하고 명상하기 바랐습니다. 하나의 장소, 머무르는 장소로서의 몸을 생각했죠."

철로 구현한 조각들 표면은 붉은색을 띤다. 곰리는 "녹슨 철은 단순히 낡거나 쇠퇴한 것이 아니라 산소와 반응하며 생명을 상징하는 변화의 증거"라고 설명한다. 철의 붉은색은 곰리에게 태양, 피, 흙과 연결되는 생명의 파장이다. 곰리의 대표작 영국 북동부 도시 탄광촌 게이츠헤드에 세운 '북방의 천사'처럼 그의 작업은 단순한 조각을 넘어 장소성과 시대 정신을 끌어안는 작업으로 알려졌다.

전위무용가 홍신자가 19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의 상설관 그라운드에서 관객 참여를 이끌어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뮤지엄산 제공
전위무용가 홍신자가 19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의 상설관 그라운드에서 관객 참여를 이끌어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뮤지엄산 제공


◇ 몸으로 건축을 사유하다… 명상과 감각의 공간 = 곰리와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의 협업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땅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 땅과의 관계를 다시 쓰는 작업"이라고 그는 말했다. 두 사람은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아 닫힌 공간 대신 열린 공간을 탄생시키고자 했다. 천장을 통해 내려오는 태양광은 시간을 따라 움직이며, 공간 전체에 해시계 같은 리듬을 부여한다. 자연을 향해 열려있는 공간으로 외부와 내부 경계를 허물고 새 소리·바람 소리가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기획 의도다.

"이 공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곳을 지나가는 관람자들이 몸으로 느끼고, 사유하고, 참여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라운드는 단순한 미술관도, 전시장도 아니다. 걷는 것, 숨 쉬는 것, 바라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감각적 명상이 된다. 곰리의 작품에는 인도에서 받은 '위빠사나'(Vipassana) 명상 수련이 엿보인다. 초기 작업에서 자신의 몸을 석고로 캐스팅하는 '실물뜨기' 방식으로 조각을 제작한 이유도 정적인 상태에서 느껴지는 경험을 더 깊이 알아차리기 위해서다. 곰리는 몸의 감각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인간성과 생명권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바라본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에서 조각 거장 안토니 곰리가 19일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김나인 기자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에서 조각 거장 안토니 곰리가 19일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김나인 기자


◇ "AI 시대 조각은 마지막 보루… 동물적 본성 찾아야"= 곰리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소통을 위한 단절'을 제시했다. 그는 "조각은 이 세계를 직접 만지고 변화시키는 예술"이라며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이 지배하는 '주의력 경제'(attention economy) 시대에 조각은 인간의 감각과 몸을 되찾는 마지막 보루"라고 강조했다.

그는 "촉촉한 인간 두뇌를 메마른 AI가 대체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곰리는 "오늘날 사람들은 화면에 빠져있는 디바이스 종이 된 상태로 살고 있다"며 "현재 AI와 관련한 시도는 제도로 통제, 규율되지 않은 채 이뤄지는 전세계적 실험"이라고 말했다.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동물적인 본성을 되찾아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우리의 몸은 우주만큼이나 미지의 자율적 존재"라며 "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가 속한 우주를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뮤지엄 산 내 안토니 곰리 국내 개인전. 김나인 기자
뮤지엄 산 내 안토니 곰리 국내 개인전. 김나인 기자
뮤징지엄 산에 전시된 안토니 곰리의 '리미널 필드' 연작. 김나인 기자
뮤징지엄 산에 전시된 안토니 곰리의 '리미널 필드' 연작. 김나인 기자
뮤징지엄 산에 전시된 안토니 곰리의 '올빗 필드II'. 김나인 기자
뮤징지엄 산에 전시된 안토니 곰리의 '올빗 필드II'. 김나인 기자


◇ 안토니 곰리 국내 최대 개인전 = 뮤지엄 산에는 역대 최대 규모의 국내 개인전 '드로잉 온 스페이스'도 문을 연다. 조각 7점, 드로잉·판화 40점, 설치작품 1점으로 구성된 총 48점을 선보인다. 용수철, 비눗방울을 떠올 듯 기포처럼 가볍고 유동적인 형상으로 구현된 7점의 인체 형상들로 구성된 '리미널 필드'(Liminal Field) 연작과 '몸 안의 암흑'을 표현한 곰리의 드로잉·판화 연작 '보디 앤 소울'은 인체와 공간, 자연의 상호 관계를 다시 한번 돌이켜보게 한다. 수십 개의 굵은 철로 만든 원형 구조물이 공간을 가득 채우다 못해 삐져나오는 '올빗 필드 II'는 허리를 굽히거나 몸을 기울이며 관람객이 직접 공간 사이사이를 이동하며 탐색하도록 해 숨어있던 감각을 일깨운다. 상설관 개관을 기념해서 연 드로잉 온 스페이스 전시는 11월 30일까지다.

원주/글·사진=김나인기자 silkni@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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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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