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근 인텔런트 특허법인 변리사
"특허는 권리 이전에 자산이다." 이는 단지 상징적인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출원한 특허가 심사 지연으로 등록되지 못해 지식재산권(IP) 담보 대출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자산은 있으되 자금은 없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특허심사 지연으로 인해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따로 있다. 자금 여력이 절박한 중소기업들이 '등록된 특허'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융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눈앞의 대출 하나를 받지 못해 공장이 멈추고, 인건비를 줄여야 하며, 심지어 기술을 헐값에 넘겨야 하는 현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특허 지연의 그림자'다.

몇 년전 정부는 IP 담보 대출을 활성화하겠다며 다양한 지원 방안을 내놓았다. 실제로도 2024년 기준으로 약 10조원 규모의 특허 담보 대출이 이뤄졌다. 특히 BB등급 이하 저신용 기업이 75%를 차지할 만큼, 중소기업의 자금줄로 기능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한 가지 대전제가 있다. '등록된 특허'여야만 한다는 점이다. 출원 중인 특허는 아무리 기술력이 좋아도 담보로서의 가치는 제로에 수렴한다. 등록 여부가 곧 생존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특허가 등록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16개월에 달한다. 우선심사를 신청하면 2~3개월로 단축된다고 하지만, 실제 심사 일정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시장은 시차 없이 반응한다. 그런데 1년 반 후에야 등록 여부가 결정된다는 건, 자금이 절실한 기업 입장에선 치명적이다.

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투자자는 기다려주지 않고, 금융기관은 담보가 없다며 대출을 거절한다. 기술력이 있어도 돈이 없어 사업을 접는 아이러니가, 지금 대한민국의 창업 생태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왜 출원 중인 특허는 담보로 인정되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불확실성 때문이다. 심사 결과에 따라 등록이 거절될 수 있고, 등록되더라도 청구항이 축소될 수 있으며, 무효 가능성도 존재한다. 금융기관은 철저히 회수 가능성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등록 전 특허는 '위험한 자산'으로 분류된다.

실제로 담보 설정을 위한 절차인 '질권 설정'은 등록 특허에서만 가능하다. 출원 중인 특허에는 법적으로 담보 설정이 불가능하다. 이 말은 곧, 심사 지연이 곧바로 자금조달 지연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출원했어도, 등록 전까지는 '서류 한 장'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이 문제는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훨씬 더 치명적이다. 대기업은 자산도 많고 신용도 높아 다른 자금조달 루트가 있다. 하지만 창업 초기 기업이나 기술 기반 벤처기업은 보유한 특허 한두 건이 전 재산이고, 유일한 담보다. 이들이 IP 담보 대출을 기대하는 이유는 단순한 현금 확보 때문이 아니다.

급여 지급, 원자재 확보, 생산 라인 확보 등 일상적인 운영자금 확보, 기술 확장을 위한 설비 투자, 시제품 생산과 마케팅을 위한 시장 진입 자금, 이 모든 게 특허 등록이 지연됨에 따라 올스톱되고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심사 지연이 기술 혁신의 흐름 자체를 늦춘다는 데 있다. 기업은 등록된 특허를 바탕으로 투자자를 설득하고, 정부의 기술 사업화 지원 프로그램에 신청한다. 그런데 심사가 지연되면 이 모든 기회에서도 밀려난다. 결국 등록을 기다리는 동안 후발 주자들이 먼저 시장에 진입하고, 선발 기업은 기술이 도태되거나 전략 수정에 실패하게 된다. 혁신이 먼저 출원한 기업이 아니라, 먼저 심사받은 기업에 유리한 구조가 된다면 이는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도 비극이다.

물론 특허청도 심사 인력 부족을 호소한다. 현재 심사관 1인이 담당하는 건수는 미국이나 유럽의 2~3배에 달한다고 한다. 품질 저하 우려와 함께 무효율도 40%를 넘긴다. 심사관 인력 충원, 우선심사 확대, 민간 심사관 활용 등의 대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지만 이것은 '속도'를 높이기 위한 접근일 뿐, 금융 담보로서 특허를 활용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신뢰'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즉, 지금의 심사 지연 문제는 단순히 인력이 부족한 문제가 아니라 IP를 자산화하고 금융화하는 데 필요한 제도 인프라가 부족한 구조적 문제다.

예비 심사 결과, 청구항의 견고함, 기술 분야 시장성 등을 기반으로 한 선제적 IP 평가 모델이 필요하다. 우리도 이젠 등록 여부에만 목을 맬 것이 아니라, 심사 중인 특허에 대한 잠정 가치 평가, 출원 이후 일정 기간 경과 시 담보 허용제도, 기술가치 기반의 정부보증제도(기보, 신보 등 연계)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IP 담보 대출이 '등록 이후'에만 가능한 지금의 구조는 사실상 기술 창업에 족쇄다.

이제는 특허청만의 문제가 아니다. 금융위원회, 중소벤처기업부, 산업부, 심지어 국회까지 나서서 등록 이전 단계의 IP 가치를 담보화할 수 있는 특별법을 논의해야 한다. 금융기관 또한 자산의 물성만 따지는 전통적 담보 관행에서 벗어나, 기술 기반 기업을 평가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특허를 진정한 자산으로 보는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기술 기반 국가로 도약하려면, 더 이상 '등록된 특허만이 진짜 자산'이라는 편견에 머물러선 안 된다. 심사가 늦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기술과 기업의 미래가 발목 잡히는 사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마주한 현실이다. 특허는 단순한 기술보호 수단이 아니라, 자금 유통의 허브가 되어야 한다. IP담보 대출이 활성화되어야 진정한 기술 창업 생태계가 가능하며, 그 출발점은 빠른 심사와 함께 '등록 전 가치'에 대한 제도적 인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중소기업이 특허 심사를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다. 정부와 금융권이 움직여야 한다. 자산의 문을 열어주는 '진짜 특허 제도'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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