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정부가 자위권 발동을 명분으로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 절차를 밟아 나가면서 정유업계는 전방위 모니터링 체제와 긴급 회의 체제에 돌입했다. 해상 운송 차질과 보험료 급등, 대체 수입선 전환 가능성 등을 중심으로 실무 점검 회의에 착수하며 리스크에 대비하고 있다.
23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국내 정유 4사는 대한석유협회를 중심으로 정부와 긴밀히 소통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일부 정유사 임직원들은 전날 야간 비상근무를 자처하며 호르무즈 해협의 운항 상황을 긴급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이날도 오전부터 각사별로 마련된 가이드라인에 따라 내부 점검 회의를 열었다. 현재 대량 유조선의 통과는 지속되고 있지만 사전 위험을 감지해 항로를 변경하거나 후퇴하는 사례가 포착되고 있어 유조선 운항 상태와 해상 운임 인상 여부, 보험료 상승 대응 방안 등을 논의 중이다.
이는 지난 22일 이란 의회가 자국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폭격에 대응해 호르무즈 해협 봉쇄 결의안을 가결한 데 따른 것이다. 현재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의 최종 결정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봉쇄는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이란의 의회 결의와 함께 군의 봉쇄 움직임이 병행되고 있어 정유사들은 여러 시나리오를 검토 중이다. 수입선 다변화, 스팟계약 확대, 조기 선적 요청 등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중동산 원유는 한국까지 평균 약 26일이 소요되지만 서아프리카산 원유는 항해 거리가 더 길어 통상 30~36일이 걸린다. 수송 기간이 길고 운임도 높지만 공급선 다변화를 통해 중장기적 리스크를 분산하려는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 해협은 평소에도 분쟁 가능성이 상존해온 지역이라 기본적인 대응 프로토콜은 갖춰져 있다"면서도 "단기적으로는 대응이 가능하지만 수송 지연과 비용 전가가 누적되면 정제 수익성과 공급 안정성에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한국은 현재 정부와 정유업계가 보유한 비축유가 약 200일분 수준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중동 공급이 2~3개월 이상 중단되거나 지연되면 재고 소진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지난해 기준 71.5%다.
실제 비축유의 위기로 전환되는 기준선은 통상 2~3개월 이상 수입 차단이 지속될 때다. 비축유는 물리적 수입 불능 상태 또는 중장기 공급 공백 시에 한해 방출하는 것이 원칙인 데다가 국내외 시장에 '공급 위기 본격화'라는 신호를 줘 이 시점에도 방출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석유화학 업계도 나프타 수급 차질을 우려하고 있다. 국내 석유화학사들은 대부분 국내 정유사로부터 중동산 나프타를 공급받는 구조로, 해협 봉쇄로 원유 도입이 막히면 정유사 가동률이 떨어지며 나프타 공급량도 축소될 수밖에 없다. 고부가 화학제품 생산 전반에 영향을 받게 되는 수순이다.
산업통상자원부 원자재가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19일 기준 나프타 가격은 톤당 640달러로, 전일 대비 7.93% 급등했다. 전주 대비로는 13.07% 오른 수치다.
김태환 에너지경제연구원 석유정책연구실장은 "세계 원유의 약 20%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 원유 생산지 자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각적인 대체는 어려워 한국뿐 아니라 글로벌 혼란이 불가피하다"며 "물리적 봉쇄보다는 지연이나 검문 등 절차 지연 방식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정유사들 자체적으로도 재고를 약 150일치 이상 보유하고 있다"며 "정부와 민간 정유사 모두 단기 대응은 가능하지만 장기 봉쇄 시에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한나기자 park27@dt.co.kr
22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웨스트우드 지역의 연방청사 앞에서 시위대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등을 주제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