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화 대기자 미국의 이란 핵시설 폭격을 보며 북한 핵을 떠올린다. '북핵'은 지난 30여년 동안 대한민국 국민을 괴롭혀온 지긋지긋한 고황(苦況)이다. 30년 전 지금의 트럼프 방식처럼 그걸 떨쳐버릴 기회가 있었다. 미국 기밀문서 해제로 1994년 6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핵시설 폭격을 심각히 검토했음이 드러났다. 클린턴 전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직접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당시 한국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퇴임 후 1999년 10월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인터뷰에서 미국의 북핵 폭격 움직임을 알고 클린턴 대통령에게 하지 말도록 설득했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설득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클린턴의 계획은 검토로 끝났다. 김영삼의 말을 듣고 포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 클린턴은 자서전에서 북한의 반격이 전면전으로 비화되면 미군 5만2000명(당시 한국 주둔 미군은 3만7000명, 전쟁 발발 시 추가 파병도 생각하고 있었다)과 한국군 약 50만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민간인 100만명이 사망할 것이란 보고서를 보고 접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지난 20여년 벌여온 처절한 전쟁은 상대적으로 북핵에 둔감했던 당시 대한민국 정권과 대비된다. 30년 전이면 북한이 핵을 갖지 못할 때다.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한 때가 2006년 10월이다.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을 발견 즉시 족족 파괴하는 이유는 핵무기를 개발하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그후 북한은 남한과 미국 등 국제사회를 속이며 핵무기를 개발하고 실질적으로 핵을 미 본토까지 투발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갖게 됐다. 결과론이지만 '그때 북핵을 폭격했더라면' 하는 가정과 아쉬움을 표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미국에 실제적 위협으로 떠오른 북핵을 마주하며 트럼프 행정부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라 본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지만,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결기 있게 북핵 폭격에 동조했더라면 어땠을까. 미국은 더 치밀하고 강력한 계획으로 북핵을 제거했을 것이다. 순진한 생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의외로 단순하게 귀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시 국제 정세는 북한에 매우 불리했다. 첫째, 한미 동맹이 굳건했다. 둘째, 남북한 군사력은 대등했으나, 국력에서 이미 큰 격차가 났기 때문에 총력전인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셋째, 6·25 때와 달리 중국이나 러시아는 북한을 도울 처지가 못 됐다.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는 공산체제를 정리하면서 혼란한 과도기를 맞고 있었고, 중국은 산업화에 매진해 미국과 전쟁을 원치도, 할 수도 없었다. 당시 러시아와 중국은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것이라고 어떻게 지레 겁을 먹을 수 있나. 넷째, 가장 중요한 사실로 당시는 미국이 지금보다도 더 강력한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국제질서를 마음대로 재편할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내부 사정이 피폐할 대로 피폐했다. '고난의 행군' 초입이어서 이미 굶어죽는 이들이 나오고, 중국과 접경지역에선 먹을 것을 찾아 '꽃제비'들이 떠돌아다녔다. 당시 김정일이 실권을 쥐고 있었지만 김일성의 건강 악화로 정치적 리더십은 불안했다. 김일성은 클린턴이 북핵 폭격을 검토했던 그해 6월 며칠 후인 7월에 죽었다. 클린턴이 북핵 폭격을 검토했을 때가 한국전쟁 이후 가장 좋은 통일의 기회였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지금 북한은 40~50개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 국민은 베냐민 네타냐후의 부패 혐의에 고개를 돌리면서도 이란 핵시설 폭격에 대해서는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방공망의 실탄이 소진되어가며 내 머리 위에 이란 미사일이 떨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지만 나보다는 후세대의 안전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각오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더러운 평화라도 이긴 전쟁보다 낫다"고 했다. 그러나 피로 쟁취할 수밖에 없는 평화도 있다. 역사는 지도자에게 시대적 소명을 부여한다. 30년 전 김영삼은 '네타냐후'였어야 했다. 대기자
미국의 이란 핵시설 폭격을 보며 북한 핵을 떠올린다. '북핵'은 지난 30여년 동안 대한민국 국민을 괴롭혀온 지긋지긋한 고황(苦況)이다. 30년 전 지금의 트럼프 방식처럼 그걸 떨쳐버릴 기회가 있었다.
미국 기밀문서 해제로 1994년 6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핵시설 폭격을 심각히 검토했음이 드러났다. 클린턴 전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직접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당시 한국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퇴임 후 1999년 10월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인터뷰에서 미국의 북핵 폭격 움직임을 알고 클린턴 대통령에게 하지 말도록 설득했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설득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클린턴의 계획은 검토로 끝났다. 김영삼의 말을 듣고 포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 클린턴은 자서전에서 북한의 반격이 전면전으로 비화되면 미군 5만2000명(당시 한국 주둔 미군은 3만7000명, 전쟁 발발 시 추가 파병도 생각하고 있었다)과 한국군 약 50만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민간인 100만명이 사망할 것이란 보고서를 보고 접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지난 20여년 벌여온 처절한 전쟁은 상대적으로 북핵에 둔감했던 당시 대한민국 정권과 대비된다. 30년 전이면 북한이 핵을 갖지 못할 때다.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한 때가 2006년 10월이다.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을 발견 즉시 족족 파괴하는 이유는 핵무기를 개발하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그후 북한은 남한과 미국 등 국제사회를 속이며 핵무기를 개발하고 실질적으로 핵을 미 본토까지 투발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갖게 됐다. 결과론이지만 '그때 북핵을 폭격했더라면' 하는 가정과 아쉬움을 표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미국에 실제적 위협으로 떠오른 북핵을 마주하며 트럼프 행정부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라 본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지만,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결기 있게 북핵 폭격에 동조했더라면 어땠을까. 미국은 더 치밀하고 강력한 계획으로 북핵을 제거했을 것이다. 순진한 생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의외로 단순하게 귀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시 국제 정세는 북한에 매우 불리했다. 첫째, 한미 동맹이 굳건했다. 둘째, 남북한 군사력은 대등했으나, 국력에서 이미 큰 격차가 났기 때문에 총력전인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셋째, 6·25 때와 달리 중국이나 러시아는 북한을 도울 처지가 못 됐다.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는 공산체제를 정리하면서 혼란한 과도기를 맞고 있었고, 중국은 산업화에 매진해 미국과 전쟁을 원치도, 할 수도 없었다. 당시 러시아와 중국은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것이라고 어떻게 지레 겁을 먹을 수 있나.
넷째, 가장 중요한 사실로 당시는 미국이 지금보다도 더 강력한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국제질서를 마음대로 재편할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내부 사정이 피폐할 대로 피폐했다. '고난의 행군' 초입이어서 이미 굶어죽는 이들이 나오고, 중국과 접경지역에선 먹을 것을 찾아 '꽃제비'들이 떠돌아다녔다. 당시 김정일이 실권을 쥐고 있었지만 김일성의 건강 악화로 정치적 리더십은 불안했다. 김일성은 클린턴이 북핵 폭격을 검토했던 그해 6월 며칠 후인 7월에 죽었다.
클린턴이 북핵 폭격을 검토했을 때가 한국전쟁 이후 가장 좋은 통일의 기회였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지금 북한은 40~50개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 국민은 베냐민 네타냐후의 부패 혐의에 고개를 돌리면서도 이란 핵시설 폭격에 대해서는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방공망의 실탄이 소진되어가며 내 머리 위에 이란 미사일이 떨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지만 나보다는 후세대의 안전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각오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더러운 평화라도 이긴 전쟁보다 낫다"고 했다. 그러나 피로 쟁취할 수밖에 없는 평화도 있다. 역사는 지도자에게 시대적 소명을 부여한다. 30년 전 김영삼은 '네타냐후'였어야 했다.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