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終南山(종남산)
太乙近天都 (태을근천도·태을봉은 서울과 가까운데)
連山接海隅 (연산접해우·연이은 산은 바다 끝에 닿아 있다)
白雲回望合 (백운회망합·흰 구름은 돌아보니 합쳐 있고)
靑靄入看無 (청애입간무·푸른 안개는 들어서니 보이지 않네)
分野中峰變 (분야중봉변·별자리 나뉜 하늘의 구역은 중봉에서 그 경계가 나뉘고)
陰晴衆壑殊 (음청중학수·흐리고 맑음이 골짝마다 다르다)
欲投人處宿 (욕투인처숙·사람 사는 곳에 머물고자)
隔水問樵夫 (격수문초부·냇물 건너 나무꾼에게 물어본다)
중국 성당(盛唐) 시기 시인인 왕유(王維)의 '종남산'(終南山)이란 시다. 종남산의 웅장함이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태을봉은 종남산의 주봉으로, 종남산을 태을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심심유곡과 봉우리에 걸린 구름과 안개, 산자락을 싸고 도는 시냇물, 그 곁에 보일 듯 말듯 한 사람들. 왕유의 시는 종남산을 한폭의 풍경화처럼 그려낸다. 그래서 후대인 송의 소동파는 왕유의 작품을 평가하면서 "시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시중유화 화중유시)라고 했다.
종남산(중난산)은 섬서성(陝西省·산시성) 서안시(西安市·시안시)에 있는 산이다. 도교의 탄생지다. 불교의 율종 가운데 남산율종(南山律宗)의 발상지이자 화엄종의 유서깊은 사찰인 지상사(至相寺)가 있는 곳이다. 신라의 고승인 의상대사와 자장율사, 원측(圓測) 스님이 머물며 배웠던 곳이기도 하다. 종남산은 중국에서 중남산(中南山), 남산(南山), 태을산(太乙山)으로도 불린다. 이 산을 기준으로 중국의 남과 북을 경계짓는 관습도 있다.
왕유(699 ~ 759년)의 자(字)는 마힐(摩詰)로 시성(詩聖) 이백, 시선(詩仙) 두보와 함께 '시불'(詩佛)로 불렸다. 그가 불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왕유의 아버지는 관리였으며,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왕유도 이런 어머니의 영향 아래 자라났다. 왕유의 자인 마힐(摩詰)도 불경인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왕유는 열다섯 살 때부터 수도에서 학문을 익혔다.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에 이미 시인으로 이름이 나 있어 현종의 형인 영왕(寧王) 헌(憲)이나 동생인 설왕(薛王) 업(業)으로부터 스승이나 벗으로 대우받고 귀족 모임에 불려다니는 등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왕유는 우애가 깊었고 아내와도 금슬이 좋았으며, 초서, 예서 등의 서예에도 뛰어났다. 음악 특히 비파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림 속의 악사만 보고 악사가 연주하는 곡은 예상우의(霓裳羽衣) 제3첩 첫번째 박자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왕유는 특히 수묵화에 뛰어났다. 그의 그림은 '천기'(天機), 즉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지 사람이 배워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고 했을 정도다. 왕유의 화풍은 화가 오도현(吳道玄)을 닮아 있었지만 풍격은 보다 걸출했고, 정건(鄭虔), 필굉(畢宏)과 함께 3절로 불렸다. 명대에는 산수화 분야에서 이사훈을 북종화의 선조, 왕유를 남종화(문인화)의 선조로 쳤다.
대대로 관리 집안에서 태어난 왕유도 진사(進士)과에 합격해 관리가 됐으나 기복이 심했다. 안록산의 난때에는 장안을 미쳐 빠져나가지 못하고 잡혀, 안록산의 강요로 관직을 맡은 게 문제가 돼 난이 실패로 끝난 후 죄인으로 몰렸다. 이 일은 왕유가 더욱 불교에 심취하는 계기가 됐다. 왕유는 평생 매일처럼 향을 피우고 불경을 읽었다고 한다. 종남산 망천(輞川)에 있는 별장 일부를 희사, 사찰로 삼기도 했다.
불교 신자인 왕유에게 자연은 참선의 대상이었다. 전원 생활을 묘사한 시에서도 풍경화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위천전가(渭川田家·위천 땅의 농가)
斜陽照墟落(사양조허락·지는 해는 들녘의 농가를 비추고)
窮巷牛羊歸(궁항우양귀·좁은 마을길로 소와 양 돌아오네)
野老念牧童(야노념목동·노인장은 목동을 걱정하며)
倚杖候荊扉(의장후형비·지팡이 짚고 사립문에서 기다리네)
雉구麥苗秀(치구맥묘수·꿩 우니 보리에 이삭 패고)
蠶眠桑葉稀(잠면상엽희·누에는 잠들어 뽕잎 드물다)
田夫荷鋤至(전부하서지·농부들은 호미를 메고 다가와)
相見語依依(상견어의의·마주보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
卽此羨閑逸(즉차선한일·이를 보니 한가롭고 편안한 생활 부러워)
창然吟式微(창연음식미·허전한 마음에 '식미'(式微) 가락 읊조리네)
석양이 들판의 농가를 비추고 있고, 한 무리의 소와 양들이 깊고 구석진 골목으로 돌아오고 있다. 노인은 소와 양떼를 돌보러 나간 아이를 걱정하며, 사립문 옆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꿩이 우니 보리는 이미 패고, 누에가 깊이 잠든 때라 마을의 뽕나무 잎은 성글다. 농부들은 호미를 메고 길가에 서서 웃으며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할아버지와 호미를 둘러맨 농부의 모습이 영낙없는 초여름 한가로운 농촌의 저녁 풍경이다. 이 광경을 보니 그들의 편안하고 한적한 생활이 부러워,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식미'(式微)는 '시경'(詩經) 패풍 편에 나오는 시로, "날로날로 여위면서 어찌 안돌아 가시나"(式微式微 胡不歸·식미식미 호불귀)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왕유의 전원시는 동시대 시인인 맹호연과 비교하면 자연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곁에서 관조하는 데 그친다는 평가를 듣는다. 대자연으로 돌아가 은거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 것이다. 마흔 살을 넘어 장안의 동남쪽인 망천에 별장을 사들였는데 귀족적인 은거 생활을 했다.
불교 신자였던 까닭에 선(禪)을 담은 시도 썼다.
鹿柴(녹시)
空山不見人(공산불견인· 빈 산에 사람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단문인어향·말소리만 들리네)
返景入深林(반경입심림·반사되는 그림자 깊은 숲에 들어와)
復照靑苔上(복조청태상·다시 푸른 이끼 위에 비치고 있네)
시인은 직관과 '텅 빈 마음'으로 빈 산의 석양 무렵 깊은 숲 속에 비쳐 드는 한 줄기 햇살에 반사되는 이끼의 푸른빛과, 들릴 듯 말 듯한 사람의 음성을 담담한 심정으로 묘사했다.
왕유는 담백하며 참선의 분위기를 풍기는 시를 많이 남겼지만 심금을 울리는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相思(상사)
紅豆生南國(홍두생남국·홍두 나는 곳 남쪽 땅)
春來發幾枝(춘래발기지·봄이라 새 가지 얼마나 돋았을까)
願君多采힐(원군다채힐·그대여 많이 많이 따시구려)
此物最相思(차물최상사·그리운 마음 가장 잘 알아줄테니까요)
홍두(紅豆)는 홍두 나무, 상사 나무 혹은 그 열매를 가리킨다. 중국 대륙 남쪽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며, 애정과 그리움을 상징하는 단어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왕유는 고결 청아인 성정(性情)이나 작품들로 후세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청대의 서증(徐增)은 "하늘이 내린 천재(天才)는 이백, 지재(地才)는 두보, 인재(人才)는 왕마힐"이라고 했다. 하지만 남송의 주희(朱熹)는 "언사가 청아하다고는 하지만 시들거리고 약하며 기골도 별로 없다"고 혹평했다. 일본의 고바야시 다이치로(小林太市郞)도 저서 '왕유의 생애와 예술'에서 그를 "고매했지만 평범했다", "세상의 오탁을 싫어하면서도 떨쳐내지도 못한 채 안이한 허송세월로 일생을 보낸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고 밝혔다. 남북조 시대 세상을 떠나 유유자적하며 은거했던 죽림칠현에 대한 평가와 유사하다.
논설실장 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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