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간첩, 테러, 마약, 사이버 범죄 등은 점점 더 조직적이고 지능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이러한 첨단범죄에 대한 수사에서 상당한 제약을 안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스마트폰 감청 수사가 불가능하다. 범죄 혐의자가 통신기기를 통해 공범과 연락, 범행계획 은닉, 증거 인멸을 자유롭게 하는 현실은 수사기관의 무력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핵심 배경에는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의 구조적 결함, 특히 감청 협조의무 조항의 실효성 부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조항은 감청을 허용하는 법원의 영장이 있더라도, 통신사업자가 이를 실질적으로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현행법 제15조의2 제1항은 '전기통신사업자는 검사·사법경찰관 또는 정보수사기관의 장이 집행하는 통신제한조치 및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의 요청에 협조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이를 강제할 실질적 제재 수단이나 감청에 관한 기술 표준이 부재하다.
그에 따라 수사기관이 보충적 수사 방식인 감청을 포기하고 일반적 수사에 안주하고 있다. 그로 인해 마약 거래, 불법 모의, 해킹 범죄에서 결정적 증거 확보가 좌절되고, 범죄 수사는 지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기소 하더라도 법정에서는 '증거 부족'으로 무죄 추정의 원칙이 남용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대비되는 대표 사례가 바로 미국의 '로빙 감청'(roving wiretap) 제도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범죄자가 사용하는 기기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특성을 반영한 '애국법'(PATRIOT)을 제정해 사람을 기준으로 감청 영장을 발부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수사기관은 범죄 혐의자가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기기를 교체하거나 우회하여도 통신을 실시간으로 감청할 수 있게 됐다. 테러와 마약, 해킹 범죄에 대한 유연하고 효율적인 대응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한 예로 2020년 캘리포니아 'SIM 스와핑 금융 사기단' 수사 건이다. 이 사건은 조직화된 사이버 범죄 집단이 개인 정보를 탈취하여 스마트폰 번호를 다른 SIM으로 옮겨 피해자의 금융 계정을 탈취한 범죄였다. 용의자들은 범행 후 스마트폰과 SIM을 바로 폐기하고, 가명 계정과 암호화 메신저만을 사용해 움직였다. FBI는 이들 통신 수단을 특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법원 승인 아래 로빙 감청을 수행해 SIM 스와핑 관련 대화, 암호화폐 지갑 주소, 계좌번호 증거를 확보하여 주요 피의자 Richard Yuan Li를 포함한 조직원 11명을 체포하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미국 의회가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고 유지해 온 과정에서 보여준 초당적 협치이다. 9·11 직후에는 공화·민주 양당이 모두 국가안보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 법률 제정에 협력했고, 그 후에도 프라이버시 보호와 국가안보 사이의 균형을 조율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제도를 재검토했다. FISA 수정법이나 자유법(FREEDOM Act)과 같은 법률은 양당의 협상을 통해 마련된 절충의 산물이다. 국가안보와 프라이버시를 정쟁의 소재로 여기지 않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기본적인 책무이자 준엄한 가치의 실현임을 명확히 보여줬다.
반면, 한국에서는 디지털 환경의 급변에 비해 법 제도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감청의 대상, 방법, 협조 의무 등 여러 측면에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개정 논의는 정치적 대립 속에서 공전 중이다. 범죄자는 스마트폰 내부에서 범죄 흔적을 지우며 수사망을 유유히 빠져나가고, 공권력은 무기력해 무고한 시민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납세자인 피해자만 억울하다. 이것을 알면서도 방관하는 비정상 상태가 오래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범죄자 인권 보호와 같은 원칙만을 내세우며 수사 효율성을 도외시할 것이 아니라,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합법적 수사기법을 속히 도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파 이익을 초월한 초당적 협치가 절실하다. 미국처럼 국가안보와 국민 안전에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선진국형 형사사법 시스템 구축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