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논설위원
미국발 통상 압박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고, 그 여파로 한국 수출이 흔들리는 모양새다. 지난 5월 1일부터 20일까지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2.4% 줄었다. 수치만 보면 소폭의 감소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심각하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안정성과 직결되어 있는 대미 수출이 무려 14.6%나 줄어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내세운 해법이 바로 '줄라이 패키지'(July Package)다. 한미 간 2+2 통상·산업 협의체를 중심으로 추진 중인 포괄적 협상 방안이다. 7월을 타결 시점으로 잡고 있어 '줄라이 패키지'로 불린다. 협의 대상은 균형 무역, 비관세 조치, 경제 안보, 디지털 교역, 원산지, 상업적 고려 등 6개 분야가 될 전망이다.

핵심은 이 패키지가 실질적인 관세 방어막이 될 수 있을지 여부다. 협상이 선언적 수사에 머물거나, 미국 측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귀결된다면 '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을 '더러운 15개국' 중 하나로 지목하며 일괄 타결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만약 줄라이 패키지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21세기판 '을사늑약'이라는 오명을 남길 수 있다.

굴욕적 협정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지금 한국에게 필요한 건 한미 경제 관계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전략 재설정이다. 이를 위해선 우선 한미 동맹의 '값어치'를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혈맹'이라는 감성적 수사에서 벗어나 한미 관계를 실익 중심으로 재정립해야하는 것이다.

국익의 개념도 보다 현실적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미국산 농산물 수입을 늘리거나, 규제 완화 요구를 수용하는 방식은 단기적 타협에 불과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국가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현대차의 미국 수출 확대나 조선업의 해외 이전과 같은 개별 기업의 이익이 곧 국가 전체의 이익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수출 중심 성장 모델이 한계에 이른 지금, 국익은 복합적이고 균형 잡힌 관점에서 재구성돼야 한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주도적인 외교 전략이 절실하다. 최근의 미중 관세 협상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양국은 지난 10~11일(현지시간) 스위스에서 열린 경제무역 회담을 통해 향후 90일간 미국은 대중 관세를 145%에서 30%로, 중국은 대미 관세를 125%에서 10%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양측 모두 115%포인트 내렸다.

이번 협상은 중국의 판정승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략적 요인들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시진핑 주석의 '버티기 전략'이 주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기 불안을 잠재울 필요가 있는 상황이었다. 시 주석은 협상을 서두르지 않음으로써 트럼프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협상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희토류 수출 통제를 카드로 꺼내며 공급망을 무기화한 전략도 큰 힘을 발휘했다. 중국은 미국의 첨단산업이 희토류에 의존하고 있다는 약점을 정확히 겨냥했고, 이로써 협상에서 실질적인 레버리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번 미중 협상의 본질은 중국의 전략적 인내, 자원 무기화, 여론전 등이 총체적으로 작동한 결과였다. '버티는 자가 이긴다'는 외교의 실상을 다시금 증명한 협상이기도 했다. 격렬한 충돌 속에서도 손해를 최소화한 중국의 협상 기술은 분명히 한국이 벤치마킹할 만한 대목일 것이다.

한국 역시 미국에게 휘둘릴 것이 아니라, 전략적 유연성을 바탕으로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외교란 과거를 기리는 의식이 아니라, 미래를 지켜내기 위한 냉정한 선택의 연속이란 점을 마음에 새기고 실질적 행보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 시작점은 '줄라이 패키지'가 되어야 한다. 트럼프의 전방위적 통상 압박에 맞서려면 감정이 아닌 전략, 선언이 아닌 실익 중심의 협상이 필요하다. '줄라이 패키지'는 이 전환을 이룰 수 있는 첫 시험대다. 이 시험을 넘지 못하면 사리지는 것은 기회이고, 남는 것은 위기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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