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에 쌓아놓은 명함 무덤을 아무리 뒤적여 봐도 내가 찾는 '그 사람'의 명함만은 찾을 수가 없다. 가끔은 자켓 호주머니에 가끔은 가방 귀퉁이에 영문 모를 방식으로 숨어있기도 했다.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과거에 직장인들이 매일 같이 하는 일이었다. 몇년 전 나타난 '국민 명함 앱'이라고 불리는 '리멤버'는 이 사소하지만 반복되는 불편을 해결하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었다.
리멤버 외에도 세금 환급 서비스 '삼쩜삼', 인공지능(AI) 경리서비스 '자비스'를 만들어 낸 김범섭(46·사진) '자비스앤빌런즈' 창업자 겸 최고글로벌전략책임자(CGO)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성공한 연쇄 창업가인 그는 원래 사업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카이스트(KAIST)에서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하고 연구원이 될 작정이었다. 박사 과정을 밟던 중 당한 스키 사고 때문에 때늦은 진로 고민이 시작됐다. "죽을 뻔한 사고로 1년이나 재활치료를 하면서 '좀 재밌고 의미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큐멘터리 PD가 되고 싶었지만, 방송국 시험엔 번번이 떨어졌죠."
2006년 KT 와이브로사업본부에 들어갔다. 신규 사업 심사를 하는 일을 맡았는데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특히 벤처기업 대표들과 만나 사업 이야기를 하는 게 제일 즐거웠다. 그때 위젯 서비스 전문업체인 위자드웍스의 표철민 대표를 만나 조직에 합류했다. 이후 2009년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인 '아이티에이치(ith)'를 창업했다.
"외주 개발업이었으니까 처음부터 돈을 잘 벌었어요. 그러다 이웃 사무실의 선데이토즈 팀이 만든 '애니팡' 서비스가 크게 성공하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당장 수익을 내진 않지만 전국민이 쓰는 서비스, 그런 사업도 있구나. 거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2011년 그루폰 코리아로부터 제안을 받고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았다. 이어 패스트트랙아시아 CTO까지 역임하며 스타트업 경력을 확장했다. 2012년 여름에는 단돈 3억원을 가지고 두번째 창업에 나섰다. 한국의 '링크드인'이라고 불리며 현재 수천만명이 넘는 가입자를 확보한 국내 1위 명함 관리앱 '리멤버'의 개발사 드라마앤컴퍼니다.
"남은 현금으로 한달 정도 버틸 수 있을까 할 때 리멤버가 나왔어요. 처음엔 모니터 왼쪽 화면에 명함을 붙여 놓고 제가 직접 명함정보를 입력했어요. 문자인식(OCR) 프로그램 개발을 할 돈도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시연용 앱을 만들어 투자를 받았다.
명함 정보를 전산화 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은 사람이 입력하는 것이었다. 국내 유효 명함이 1000만장이라고 치고, 파트타임 타이피스트에게 건당 30원씩 지급했기 때문에 1000만장 입력해 데이터가 생기는 데 3억원이면 된다 하는 단순한 계산을 세웠다. 서비스 출시 단 4년 만에 네이버에 매각될 당시 드라마앤컴퍼니의 기업가치는 약 450억원으로 평가받았다.
김범섭 자비스앤빌런즈 창업자 겸 최고글로벌전략책임자(CGO). [자비스앤빌런즈 제공]
2015년 '삼쩜삼'과 '자비스'를 운영하는 자비스앤빌런즈까지 잇따라 창업에 성공했다. 미환급 세금을 온라인으로 조회하고 환급받을 수 있게 돕는 삼쩜삼 서비스도 처음엔 투자자들의 냉대를 받았다. "투자자는 '도대체 누가 이걸 쓰겠나. 근로 소득자는 회사에서 연말정산을 하고 사업자들은 세무사를 쓴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우리 정부의 홈텍스 서비스가 잘 구축돼 있어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세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회사는 드물었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삼쩜삼은 서비스 가입자 2400만명, 삼쩜삼을 통해 세금 신고를 하는 고객이 300만명에 달하는 또 다른 국민 앱이 됐다. "세무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싶었어요. 알바, 프리랜서, 배달·택배·대리 기사, 크리에이터 등 새로운 형태의 근로자들과 복수의 직업을 가진 'N잡러'도 쉽게 세금 신고를 하게 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국세청도 수집하지 못하는 각 개인들의 자료를 간단하게 환급에 반영할 수 있고요. 앞으로는 실손보험 환급 등 다른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서비스를 내고 싶어요."
또 한번의 성공. 스타트업 업계에서 보기 드문 연타석 홈런을 날린 김 대표는 최근 <코어 씽킹>이라는 책을 내고 그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하려고 한다. "생각해 보니까 16년 간 사업을 하면서 실패한 서비스만 20개가 넘어요. 그러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초기 삼쩜삼만 해도 투자자들에게 거절당하면서 에너지를 많이 잃은 상태에서 만들었어요. 기능 많고 완성도 높은 서비스보다 쉽고 단순하게 본질에 집중한 서비스가 더 잘 되더라고요. 창업가가 아닌 회사원들도 마찬가지에요. 너무 잘하고 싶은 자신의 욕심에 갇히지 말고 고객이 원하는 일인가를 고민하고 거기에 더 집중하고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에게도 사업은 실패와 좌절을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기획과 디자인, 남들이 말하는 트렌드, 표 나는 겉치레에 집중했을 때는 실패했고, 대신 실행과 기능, 자신만의 목표, 표 안나는 합리에 충실했을 때는 성공했다. 부자의 성공법이나 현인의 조언이 쏟아지지만, 종국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매일 하는 업의 본질을 아는 것, 그 것이 세상을 바꾸는 일의 시작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