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대통령 선거일이 2주 남짓 다가온 가운데 대선 후보 간 선거전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대선 후보들은 각 분야별 공약을 내세워 국민들의 표심 얻기에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예정에 없던 대선을 일찍 치르는 탓에 대선 후보들의 주요 공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크지 않은 것 같다. 대선 후보 간 공약도 '그 나물에 그 밥'인 듯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공약은 각 후보들의 국가 경영 비전과 철학을 담고 있어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잣대로 작용한다. 그 중에서 과학기술 분야 공약은 대한민국의 미래와 운명을 좌우하는 바로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크다.
첨예한 글로벌 기술패권 시대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을 반영하듯 과학기술인 시민단체인 바른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과 과학기술 대표 석학단체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나서 과학기술 정책과 어젠다를 대선 후보들에게 제언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은 한 마디로 새 정부에 대한 과학기술 중시 국정 운영으로 모아진다.
역대 대선 때마다 후보들은 다양한 과학기술 비전과 공약을 제시하며 과학기술 표심을 공략해 왔다. 노무현 정부는 '제2의 과학기술 입국 실현', 이명박 정부는 '선진 일류 국가를 향한 577 이니셔티브', 박근혜 정부는 '창조적 과학기술로 여는 희망의 새 시대', 문재인 정부는 '과학기술 발전이 선도하는 4차 산업혁명', 윤석열 정부는 '자율과 창의로 만드는 담대한 미래-과학기술선도국가' 등을 비전으로 제시하며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 운영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작 집권 후에는 대선 후보 당시 내세운 대부분의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으로 전락했고, 이념과 진영에 따른 정치 논리에 의해 과학기술은 여지 없이 흔들렸다. 심지어 녹색성장(이명박 정부), 창조경제(박근혜 정부), 4차 산업혁명(문재인 정부), 국가전략기술(윤석열 정부) 등 역대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학기술은 철저히 이용당해 왔다.
이번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들의 과학기술 분야 공약을 보면 연구개발(R&D) 예산 확대, 우수 과학기술 인재 양성 및 유치, 과학기술인 처우 개선, 정부 거버넌스 격상 등으로 요약된다. 그 중에서 김문수 후보와 이준석 후보의 공약은 구체성이 도드라진 반면 이재명 후보의 과학기술 공약은 구체성이 다소 떨어져 보인다. 당과 캠프에서 이를 인식한 듯 이 후보는 과학기술계 단체와 협력해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정책을 별도로 내놓으며 공약의 충실도를 채워가고 있다.
그럼에도 대선 후보들이 제시한 과학기술 공약을 살펴보면 국내 과학기술 생태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와 본질적 한계 등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고민 없이 급조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점에서 우려스럽기만 하다.
국내 과학기술은 안팎으로 위기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수한 인재는 이공계보다는 미래가 보장되는 의대를 선호하는 현상이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AI 등 이공계 우수 인력은 빠르게 해외로 빠져 나가는 한편 해외에서 공부를 마친 인재들은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여기에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원자력 관련 학과에서 미달 사태가 벌어졌고,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력 산업 생태계는 붕괴됐다. 윤석열 정부에선 대통령의 느닷없는 'R&D 카르텔' 지목 이후 정부 R&D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과학기술 연구현장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국가 권력은 언제든 정권 입맛에 따라 과학기술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과학과 정치는 '불가원 불가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6·3 대선 후보들의 과학기술 공약이 선언적 수사(修辭)가 아닌 탄탄한 실행력을 통해 국가 경영의 중심축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차기 대통령은 새로운 과학기술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