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민영휘보다 재산 적다며 체납하자 들끓는 여론

'선유선보, 악유악보', 그 말은 지금도 유효한가


최근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수괴 이완용(李完用)의 증손자가 국가에 환수된 선대의 토지를 반환받기 위해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한 뒤, 해당 토지를 곧바로 매각하고 캐나다로 떠났다는 씁쓸한 뉴스가 전해왔다. 100년 전 나라를 팔아 부를 쌓은 한 인물의 이름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셈이다.

1925년 5월 8일자 조선일보에 눈에 띄는 이완용 기사가 하나 있다. "당대의 유수(有數;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매우 두드러지다)한 부자로 세상이 다 인정하는 이완용 후작과 그의 아들 이항구(李恒九) 남작이 경성부에 납부할 학교비 4,000여 원을 너무 많아 못 내겠다고 뻗댄다고 함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 바, 일반 부민에게는 독촉장 나온 지 한 달이 못 되어 차압을 한다, 집행을 한다 하는 경성부 당국이 특별히 이완용 후작에 대해서는 납부 기한이 지난 지 반년이 되도록 그 체납에 대하여 하등(何等)의 결정을 내지 못하고, 다만 그 권세와 금력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모양은 실로 추태 중의 추태라 아니 할 수 없다고 일반 부민의 비난이 높다. 경성부 당국의 변명에 의하면 납세 당사자인 이완용 후작으로부터 너무 많다는 이의 신립(申立; 개인이 국가나 공공단체에 어떤 사항을 청구하기 위하여 의사 표시를 함)이 있었으므로 다시 그 소유 재산을 조사하여야 할 터인데, 아무리 해도 경성부 당국의 무능과 무성의를 유감없이 폭로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완용의 세금 체납에 대한 기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다 내놓아도 나만은 못 내놓겠다고 어디까지 굳세게 호별할(戶別割)을 내놓지 않고 뻗대는 이는 전 한국 내각 총리대신, 현 조선 중추원 부의장 겸 후작 각하 이완용(李完用)씨요, 그렇다고 머리를 굽혀 제발 좀 내주십사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이는 30만 시민의 믿음을 한 어깨에 지고 있는 곡(谷) 경성부윤이다. 결국은 우리 30만 시민의 모든 세력을 한데 뭉친 큰 통괄 세력체 하나가 이(李) 후작의 한 세력을 못 당하는 모양인가?" (1924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

당시에서는 세금 체납으로 재산이 차압되는 일이 많았다. 체납이 되면 바로 차압에 들어갔는데 심지어는 가난한 사람들의 솥과 숟가락까지도 가차없이 차압을 하였다고 한다. "경성부에서는 요사이 징수 폐쇄기가 가까웠으므로 세금 독촉이 우심하여 매일 차압하는 것이 150여 건이라고. 그 중에 수도세는 사글세 집 주인들이 세든 사람에게는 또박또박 받아가지고 정작 부청에는 안 바치는 폐단이 많아서 제일 두통을 앓는다나. 그 사람들이 모두 후작 대감(이완용)이 아닌 바에야 무엇을 꺼리는지. 경성부도 누구든지 돈 있는 사람에게는 힘을 못 쓰는 모양." (1925년 5월 22일자 매일신보)



세상 여론이 떠들썩하자 경성부는 부윤이 직접 이완용을 찾아가 세금 납부를 부탁했다. "전 한국 내각 총리대신으로 현재 중추원 부의장으로 있는 이완용 후작과 그 둘째 아들 이왕직 예식과장 종사 위훈 2등 이항구(李恒九) 남작이라 하면 누구나 다 그가 조선의 몇째 아니 가는 큰 부자로 수천만 원 수백만 원의 현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들 하는데, 이(李) 후작에게 부과된 5등 호별할 3,800원과 이(李) 남작에게 부과된 400원을 절대로 내지 않겠다고 납세에 응하지를 않으므로, 경성부에서는 그 지위를 돌보아 여러 번 권고를 하였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므로, 수일 전에는 곡(谷) 부윤이 친히 자동차로 이(李) 후작을 방문하고 보통학교 교육을 위하여 호별할을 내주면 고맙겠다고 권고를 하였으나 완강히 거절을 하였으므로, 곡(谷) 부윤은 무료히 돌아왔다는데, 그 후에 이(李) 남작으로부터 오히려 자기네의 총 재산은 이것밖에 없는데 호별할이 비싸니 차압을 당하더라도 낼 수는 없다는 최후 통첩 비슷한 회답이 부윤에게 돌아왔는데, 아무리 속과 뜻이 다른 후작가(侯爵家)의 일이라 해도 행실이 여기까지 미쳐서는 기막힐 일이라고 일반은 새삼스럽게 놀라며 타매(唾罵; 침을 뱉고 욕함)하기를 말지 않는다더라." (1924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완용이 세금은 안 내는 이유가 자세히 실려 있다. "금년 5~6월경에 이(李) 후작은 호별할이 적다 하여 재산을 조사해 본 후에 6등에서 5등으로 한 등이 올라 민영휘(閔泳徽)씨와 동액(同額)이 되었는데, 이(李) 후작의 의견은 민영휘 씨는 자기보다 재산이 더 많은데 왜 동등인가 하고 이에 불만을 품어 안 내기로 결정을 한 모양인데, 사실로 민영휘 씨는 이(李)후작보다 많기는 많으나 작년에 100만 원이라는 많은 돈을 휘문학교에 떼어 놓고 또 민영휘 씨 가정에는 십 수명이나 각각 호별할을 내는 처지이니 이것을 비교해 보면 이(李) 후작은 오히려 적으리라고 한다."

결국 세간의 여론이 거세졌다. "그 문제는 벌써부터 말썽 중이던 것이외다. 원래 이(李) 후작이라 하여 말할 것도 못 됩니다마는 나는 오히려 경성부 당국의 태도를 분개합니다. 저 불쌍하고 가난한 부민에게서는 기한만 넘으면 한 개만 있는 솥이라도 뺏아 가고 숟가락 한 개라도 차압하지 못하여 애를 쓰면서, 왜 이(李) 후작에게는 손을 대지 못하는지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경성부 당국에서는 단연한 태도로 강제집행을 하여야 될 것이외다. 만일 이(李) 후작에게 손을 대지 못하겠거든 다른 부민에게는 절대로 차압 수속을 말아야 합니다." (1925년 5월 22일자 매일신보)

권력과 금권(金權) 앞에 꼼짝 못하는 모습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고전 명심보감(明心寶鑑) 계선편(繼善篇)에 '선유선보(善有善報) 악유악보(惡有惡報) 불시불보(不是不報) 시후미도(時候未到)'라는 말이 있다. '선한 일에는 선한 갚음이 있고, 악한 일에는 악한 갚음이 있다. 지금 갚음이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고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뜻이다. 악한 일에 대한 악한 갚음은 아직도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언제쯤이나 그 갚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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