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산업부장
"최태원에 SK하이닉스가 있다면, 신동빈에게는 롯데케미칼이라는 못잖은 효자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7년 롯데케미칼이 3조원의 연간 영업이익을 거두는 사상 최대 신기록을 세웠을 당시 재계에서 돌았던 말이다.

석유화학은 대한민국 산업의 뿌리 격으로,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삼성을 비롯해 SK, LG, 롯데, 한화, 금호 등 주요 대기업들이 최소 석유화학 계열사 하나 정도는 들고 있었다. 제조업 수출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중추 역할을 했고,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많은 금액을 수출하는 품목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런 석유화학이 흔들리고 있다. 롯데케미칼의 예를 들자면 2014년까지 4000억원 안팎이었던 연간 영업이익은 2017년 2조9000억원까지 치솟았다가 2020년 다시 3000억원대 초반으로 줄었다. 2021년 코로나 수요 증가로 다시 1조5000억원대로 증가하면서 기대감을 높였는데, 다음해 바로 적자로 전환해 지금까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비단 롯데케미칼 뿐 아니라 다른 석유화학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이는 경기침체가 아닌 중국의 자급률 상승이라는 공급구조의 변화에서 비롯됐다. 한국수출입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2010년 이전에는 석유화학 경기 사이클이 일반적으로 7년에서 10년의 주기를 보였으나 2020년 이후 중국의 NCC(나프타분해시설) 중심 대규모 증설과 경제성장률 둔화로 인해 불황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 미국의 견제와 중국의 인건비 상승 등으로 인해 세계 제조업의 무게 중심이 베트남과 인도 등으로 넘어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중국은 세계 최대의 생산·소비국이다. 중국 제조업 부가가치는 2022년 기준으로 세계 전체의 30% 이상을 차지했다.

중국이 다시 석유화학 생산을 줄일 가능성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과거처럼 보릿고개를 넘기면 다시 회복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반도체 역시 비슷한 흐름이다.

특히 메모리반도체는 지금까지 침체 뒤 '슈퍼사이클'이 왔지만, 인공지능(AI) 시대가 빠르게 열리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이 시장의 모든 흐름을 바꿔놓았다. 이는 SK하이닉스가 처음으로 삼성전자를 꺾고 D램 시장에서 1위를 하는 전례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방심하다간 10여년 전 중국에 세계 1위 자리를 뺏겼던 한국 디스플레이의 아픔이 이제 주요 산업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터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AI, 로봇 같은 미래 핵심 분야에서도 한국의 주도권은 흔들리고 있다.

'장미 대선'을 앞두고 주요 대선주자들은 직접 금전적 이득을 주는 솔깃한 공약으로 유권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해 AI, 반도체, 로봇 등 미래 먹거리를 키우겠다는 큰 그림도 척척 내놓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산업 구조조정'을 공약으로 내놓은 후보는 없다.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공약을 반길 유권자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조기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보다 더 필요하다. 존중하며 끝까지 버티다 보면 이기는 소위 '존버'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한국 경제를 환자로 비유하면 1998년 외환위기는 십시일반 버텨내면 이기는 그런 병이었지만, 지금은 버티면 버틸수록 더 나빠지는 그런 병에 걸려 있다.

지금이야말로 정부가 나서서 산업 구조재편의 활로를 뚫어줘야 할 시점이라는 제안을 해본다. 최근 다시 살아나고 있는 일본의 경우 1970년대 불황 산업에 대한 독점금지법 예외를 추진해 기업들의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유도했고, 1980년대에는 과잉설비를 처분할 길을 뚫어주는 법안을 마련했다. 이 같은 정부 정책에 힘입어 일본은 범용 석유화학 설비를 통폐합하고 소위 '스페셜티' 제품 비중을 늘려 단단한 소부장 경쟁력을 만들었다.

그때 한국은 일본의 이 같은 구조조정 상황을 만든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중국으로 인해 구조조정을 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지만, 역사를 배우면 과오를 줄일 수 있다.

박정일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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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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