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 제도, 서한 시대 처음 생겨… 역대 황제들 수많은 후궁 거느려 당 현종은 정일품 등 서품 내리기도… 이부인·조비연·양귀비가 유명 백거이 "평생 빈방에서 그늘과 더불어 살아온 궁녀"라는 시 남겨
(강현철의 중국萬窓)
후궁 제도, 서한 시대 처음 생겨… 역대 황제들 수많은 후궁 거느려
당 현종은 정일품 등 서품 내리기도… 이부인·조비연·양귀비가 유명
백거이 "평생 빈방에서 그늘과 더불어 살아온 궁녀"라는 시 남겨
"고향은 삼천리 밖이요, 구중궁궐에서 이십년동안 살았네. 고달픈 일생에 궁녀는 군주 앞에서 고개 숙인 채 눈물만 떨구네."
후궁들의 애환을 다룬 시다. 역대 중국 황제들은 수천의 후궁을 거느리고 희롱했지만, 그녀들의 애달픈 운명을 함께 해준 사람들은 적었다.
유가(儒家)의 삼경(三經) 중 하나인 '예기'(禮記)에는 "옛날에는 천자가 궁이 여섯, 부인이 셋, 빈(嬪)이 아홉, 세부(世婦)가 스물일곱에 어처(御妻)는 여든 하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주(周)나라 왕의 후궁이 모두 126명에 이르렀음을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황제들의 후궁 숫자는 이를 훨씬 넘어섰다.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은 6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제패한 후 6국의 후비와 궁녀, 왕녀들을 모두 데려와 거대한 아방궁에 몰아넣고 희롱했다. 당시 진시황의 후궁은 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음탕함이 하늘을 찌를 정도다.
'중국 황제, 어떻게 살았나'(쟝위싱 지음, 지문사 펴냄)에 따르면 중국에서 미인 선발제도가 처음 생겨난 건 서한 시대다. 그후 동한에서 법이 제정됐다. 당시 매년 8월 조정에서 내관을 파견, 호구 조사를 명목으로 전국 각지에서 미녀를 선발했다. 이렇게 뽑혀 입궐한 여인들은 모두 황제의 후궁이 됐다. 당시 "집집마다 13세 이상, 20세 이하의 젊은 여인들 가운데 자색이 고운 자를 선발한다"는 후궁 선발 조건도 있었다.
이때부터 후비 제도가 정착됐다. 황제의 정실은 황후(皇后)라고 하고 정실 외에 부인(夫人), 미인(美人), 양인(良人), 팔자(八字), 칠자(七子), 장사(長使), 소사(少使)가 있었다. 이후 한 무제때 첩여, 첩아, 용화, 충의가 더해졌고 원제때 또다시 소의가 보태져 후비의 등급은 모두 14가지가 됐다. 후비의 수는 수천명으로 늘었다. 한 무제는 웅대한 기개를 지닌 황제로 평가되지만 "사흘동안 굶을 수는 있지만, 하루도 여자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명광궁(明光宮)을 지은 후 15세에서 20세까지 소녀들을 두고 희롱했다. 궁녀들은 30세가 넘어야 궁에서 나와 결혼할 수 있었다. 한 무제는 또한 몸매가 수려한 소녀 200명을 선발해 행차하는 곳을 따르게 했으며, 특히 아름다운 소녀 15명은 자신과 같은 마차에 타도록 했다. 한 무제의 후궁은 무려 1만8000명이나 됐다.
위진남북조 시대 진 무제는 만명에 넘는 후궁들로도 만족하지 못해 공경(公卿) 이하의 계급 가운데서 미인을 선발하고, 선발전에는 어느 집이라도 딸을 시집보내선 안된다는 금령까지 내렸다. 그는 전국에서 뽑혀온 수많은 미녀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날마다 양이 끄는 수레에 올라 양이 제멋대로 이끄는 여인의 처소에서 밤을 보냈다고 한다. 궁녀들은 승은을 입어 출세하고자 대나무 잎을 문에 꽂아두고, 소금물을 길에 뿌려 양을 자신의 처소로 유인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대패한 수 양제도 폭군이자 음탕한 군주로 유명하다. 태자 시절부터 첩과 궁녀가 2000명을 넘었다. 황제가 되고 나선 주(周)의 제도에 따라 6궁, 3부인, 27세부, 81어처를 두었으며 후궁에 다시 6국(局)을 두고 국 아래에 24개 사(司)를 설치했다. 그리고 사마다 20며명의 여성 관리를 두고 궁과 비의 일을 관리했다. 그의 후궁은 3000명이었다고 하나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당 나라 들어 황후 아래 귀비, 숙비, 덕비, 현비를 각 한명씩 두고 부인(夫人)이라고 했다. 9빈과 9첩여, 9미인, 9재인과 보림공(寶林工), 어녀(御女), 채녀가 각각 27명이었으며 이외에 수백명의 후궁이 있었다. 당 현종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인 선발기구를 둬 매년 전국 각지에서 미인을 뽑았다. 그러자 후궁의 수는 한때 4만명이 넘기도 했다. 현종은 후비들에게도 정일품 정이품 정삼품 정사품 등의 서품을 내렸는데 이는 세인(世人)의 질시의 대상이었다. 당의 시인이던 백거이(白居易)가 "이로써 세상 모든 부모들이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게 됐네"라고 읊을 정도였다.
중국 역사상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여인으론 한 무제의 이부인(李夫人)과 한 성제때의 조비연(趙飛燕), 당 현종때의 양귀비(楊貴妃)를 들 수 있다. 이부인은 오빠인 이연년의 추천으로 한 무제의 후궁이 됐다. 조비연은 관노의 딸이었는데 어렸을 적 양아공주의 시녀로 들어가 한 성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교활한 이간질로 황후를 음해해 폐서인시키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 간 일화는 유명하다. 백거이가 '장한가'(長恨歌)에서 "후궁에 빼어난 미녀 삼천이 있었지만, 삼천명에 내릴 사랑 그녀 혼자 받았네"라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양귀비는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안사의 난)이 일어난 후 현종과의 피난 와중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부인과 조비연의 말로도 좋지 않았다.
왕의 총애를 받은 궁녀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궁녀들은 온갖 시름속에 구중궁궐에 갇혀 처량한 삶을 살았다. 백거이는 '상양백발인'(上陽白髮人)이라는 시에서 후궁의 비참한 삶을 "현종 말년에 노랑 이불 덮혀 업혀 들어온 것이 열여섯살, 지금은 어느 덧 육십이 되었네. 평생 빈방에서 그늘과 더불어 살아온, 아 그 여인은 그늘 각시"라고 노래했다. 논설실장 hckang@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