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제재로 중국의 반도체 기술 추격세가 오히려 가팔라질 수 있다. 혁신의 동력은 위기의식과 절실함인데, 미국의 관세 압박이 중국에 이런 의식을 불어넣고 있다."
국내 반도체 벤처 1세대 황철주(사진)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이 1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내놓은 진단이다. 황 회장은 혁신이 위기의식과 절실함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황 회장은 이 같은 논리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중국의 반도체 기술 혁신을 가속화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황 회장은 앞서 국내 메모리 제조사들이 호황에 힘입어 전성기를 구사했던 지난 2019년 이미 중국의 반도체 '굴기(몸을 일으킴)'를 경계해야 한다고 내다봤던 인물이다.
당시 중국 기업이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에서 차지한 비중은 1% 이하였으나, 지난해 말 기준 5% 수준까지 높아졌다. 업계에선 올해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최신 범용 D램인 DDR5 양산에도 성공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황 회장은 "중국이 빠른 혁신을 이어오고 있는데, 트럼프 관세 압박을 계기로 혁신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며 "우리 기업들은 시속 100km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 중국의 혁신 속도는 이를 뛰어 넘는 시속 2000km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이 받는 미 관세 영향은 특별히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다만 우리 기업들이 혁신 속도를 높이지 않으면 그것은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 주성엔지니어링 제공.
황 회장은 "관세 그 자체는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 반도체 관세가 시행되더라도 경쟁사나 우리 기업이나 모두 똑같은 조건이기 때문"이라며 "다만 국내 기업들이 위기 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기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황 회장은 트럼프 관세 변수와 미중 갈등을 이겨내기 위한 힘으로 '기술혁신'을 강조했다. 그는 "기술력이 있는 기업은 지금과 같은 글로벌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며 "기업 경영은 트럼프 관세 영향을 피해 갈 방안을 분석하기보다는 기술혁신에 몰두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나오는 여러 인공지능(AI)·반도체 지원 공약에 대해서도 얘기 했다. 앞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달 중순 AI 육성을 위해 100조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하루 뒤 한동훈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AI 육성에 20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맞불을 놨다.
황 회장은 "우리 정부가 100조·200조원을 투자한다고 한들, 미국과 중국의 투자 금액을 이길 수 있겠느냐"며 "투자가 물론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경쟁국들을 이길 수 있는 전략인데 그런 논의가 심도 있게 이뤄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반도체 업계 주 52시간 근무제 완화에 관해서는 "현행 제도의 목표 설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주요 기업들이 52시간 완화에만 너무 매몰되는 것 역시 문제"라며 "기업 경영인은 혁신 방안을 더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 회장은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소부장 업계의 2세 경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소부장 기업들은 그간 '무에서 유'를 일궈낸 창업주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첨단 산업 발전의 허리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과 다른 환경에서 자란 2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주성엔지니어링 광주 본사 전경. 주성엔지니어링 제공.
주성엔지니어링도 본격적으로 2세 경영 막을 올린 상황이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지난달 28일 이사회를 통해 이우경 부회장과 황은석 사장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고 공시했다. 이에 따라 주성엔지니어링의 경영은 황 회장과 신규 선임된 2명을 더해 3인 각자 대표이사 체제로 전환된다.
황은석 사장은 황 회장의 아들이다. 일부 반도체 제조사들 사이에선 소부장 2세 경영인의 자질에 의구심을 표하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황 회장은 "2세 경영인은 창업주가 회사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에 비해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며 "다만 2세 경영인은 성공에 대한 절실함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세 경영인들) 본인이 스스로 잘한다는 마음으로 회사를 이끌면 성공할 것이고,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것으로 기대하면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라며 "모범과 통찰력, 용기를 갖춰야 훌륭한 경영인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황 회장은 주성엔지니어링 주주들을 위해 주요 경영 계획도 공유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지난해 주요 메모리 기업향 원자층증착장비(ALD) 출하를 끌어 올리며 1분기 매출 1208억과 영업이익 339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각각 전년동기 대비 114%와 382% 늘어난 수치다. ALD는 고대역폭메모리(HBM)용 D램 성능을 고도화하는데 핵심 역할을 한다. 주성엔지니어링의 ALD 기술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 회장은 3-5족 화합물반도체 연구개발을 통해 미래 시장도 준비하고 있다. 3-5족 화합물반도체는 반도체 기판의 종류와 공정 온도에 관계 없이 트랜지스터 채널 형성이 가능한 기술을 말한다.
주성엔지니어링 임직원들이 지난해 10월 DTC 실리콘 커패시터용 ALD 장비 출하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주성엔지니어링 제공.
주성엔지니어링은 3-5족 화합물반도체 공정 양산 기술을 세계 최초로 보이며, 글로벌 반도체 제조의 새로운 기준을 정립한다는 계획이다. 이 기술의 수익화 시점은 오는 2027년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황 회장은 "지금까지 반도체 공정은 면적이 한정돼 있는 실리콘 웨이퍼에 단독주택 100가구 마을을 만드는 방식이었다면, 새 공정은 좁은 면적에 100가구가 살 수 있는 아파트 1개 동을 짓는 방식"이라며 "주성은 그간 혁신적인 공정 솔루션을 지속 연구해왔고, 3-5족 화합물반도체가 그 결과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황 회장은 또 내년부터는 디스플레이와 태양광 사업부의 수익성이 강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성엔지니어링의 지난해 연간 매출에서 반도체 부문이 차지한 비중은 75% 수준에 이른다. 디스플레이와 태양광 사업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작다.
황 회장은 "언젠가 무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 시장이 개화할 것으로 보는데, 이 시장이 열리면 주성은 큰 기회를 얻게 될 수 있다"며 "또 태양광 사업을 미래 역점 사업인 것으로 보고 연구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우리만의 유일무이한 기술력으로 신시장을 주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