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정작 미루고 잘 안 하게 된다.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있을 때, 보고 싶은 영화들을 잔뜩 저장만 해놓고 막상 보지 않은 게 많았다. 오래전 국민에 공원으로 개방된 청와대도 그랬다.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었다.
지난 토요일 오전 가족들과 청와대로 향했다. 만의 하나, 대선 후 폐쇄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비로소 발걸음이 떨어졌다. 봄날 풍광이 멋진 정문 앞 사랑채 건물 2층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며 직원에게 말했다. "여기 경치가 정말 좋네요. 그런데 새 정부 출범하고 대통령실이 다시 청와대로 오면 이렇게 좋은 장소가 없어질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좋죠? 주말 오후에는 더 많은 국민들이 오세요. 외국인들도 많고요. 진짜 대통령실이 청와대로 다시 올까요? 과거에도 이 건물 1층에 카페가 있기는 했었다고는 하는데….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겠죠?" 직원 말대로 점심시간이 되자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까지 더해져 청와대 인근은 산책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청와대 정문으로 들어섰다. 경내는 넓었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었던 본관부터 찾았다. 본관, 대통령 비서실이 있었던 여민관, 기자실이 있던 춘추관,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던 대통령 관저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통령이 자신의 집무실이나 관저에 있으면서 비서관들을 만나기가 물리적으로 쉽지 않은 구조였겠다는 것이 경내를 산책하며 바로 느껴졌다. 조선왕조 시대에나 어울릴법한 구중궁궐(九重宮闕), 구중심처(九重深處)의 모습이었다. 왕이나 독재국가의 독재자야 그래도 별 상관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나라의 대통령이나 총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근무 환경이었다.
수석비서관, 비서관, 행정관 등이 모여 바쁘게 일하는 여민관, 그리고 여기서 멀리 홀로 떨어져 있던 대통령. 수시로 비서관들에 물어보고 확인하고 의견을 들어 결정해야 할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유폐'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언론사 기자들과는 또 어땠나. 기자실과 프레스센터가 있던 춘추관은 대통령 집무실과는 물론이고 비서관들이 있던 여민관과도 떨어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 자신은 물론이고 비서실 직원들까지 언론 접근을 물리적으로 차단하기 쉬운 구조였다. 그래서야 대통령과 비서관들이 여론에 귀 기울이며 정책들을 결정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런 선진 민주국가가 있기는 한가.
6월 3일의 대통령 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여야의 대선주자들이 현재의 용산 대통령실에 대해 이런저런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중에는 청와대로의 복귀를 말하는 후보도 있고, 세종시로의 이전을 약속한 후보도 있다. 용산 대통령실을 손봐서 계속 있거나, 제3의 장소 신축 또는 광화문 정부청사로의 이전도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대통령실을 어느 지역으로 정하든, 누가 대통령이 되든, 반드시 지켰으면 하는 원칙이 있다. '대통령 집무실 구조'는 조선식 왕궁이나 독재자의 아방궁이 아닌 선진 민주국가, 즉 미국 백악관이나 영국 총리 집무실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혹시나 청와대로 복귀하더라도(주말에 가보니 청와대는 지금 그대로의 '국민공원'이 어울렸다. 그냥 놔두면 좋겠다. 주변 환경도 그랬고,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정치를 기억하는 '정치박물관'으로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기존 건물들을 '인테리어'하는 정도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현재의 넓은 청와대 경내 중 일부 구역에 신축 건물을 지어 집무실과 비서실, 기자실을 모두 넣는 게 좋겠다. 대통령과 참모, 언론이 물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하며 국가의 주요 정책들을 결정하고 견제해야 한다.
미국 백악관은 집무실과 관저, 비서실이 같은 건물에 있다. 영국 총리의 다우닝가 10번지(관저 겸 집무실)도 2, 3층에 총리의 관저가 있고, 1층으로 연결되어 붙어 있는 5층 건물에 직원들이 근무한다. 그런 구조 속에서 대통령이 참모들과 부대끼며 직언을 경청하고 언론의 감시를 가까이서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이 '구중궁궐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국 정치도 이제 '전직 대통령들의 줄수사, 줄구속'이라는 비극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