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가 익숙지 않은 지역에서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까지 잘 찾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목적지까지 가는 경로는 어떻게 되는지, 장치 조작에 따라 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정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먼저, 우리의 상황과 위상이 어떠한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런 다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 방법은 무엇인지, 일련의 정책 수단을 활용했을 때 어떤 효과를 발생되었는지 파악하고 그 결과를 정책 수정에 반영하면서 정교하게 컨트롤해 나가야 한다.
우리 과학기술정책을 둘러싼 상황은 어떠할까? 국가 연구개발(R&D) 100조원, 정부 R&D 30조원 시대 속에서 연구개발 환경은 대단히 더욱 복잡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의 위상과 경로를 어림짐작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어 이해하려는 것에 가깝다. 근거 기반 정책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으나, 근거 기반의 논의와 의사 결정을 위한 문화적·시스템적 토대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일례로 R&D 패러독스와 같은 이슈는 그 실체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한 채로 지난 10여 년간 과기정책 현장을 지배해 왔다. 몇 가지 지표를 바탕으로 비효율에 대한 확진 판정을 하고 다양한 종합적 정책 처방을 내리곤 하였다. 이에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서는 2023년 코리아 R&D 패러독스 현상의 실재 여부 등에 대해 다각적으로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통념과는 달리 '코리아 R&D 패러독스'라 할 만한 R&D 투자 성과 측면의 비효율이나 부진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 결과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투입 및 성과 수준에 대해 객관적으로 재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예산과 제도적 혁신 방향 역시 객관적 증거와 분석을 기반으로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증거 기반의 연구들은 더 효율적인 경로와 전략의 탐색에도 기여한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2024년 후속 연구에서는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논문 창출과 관련하여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첫째로 정부 지원의 국가연구개발사업에서 창출되는 우수 논문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반면 상위 1% 수준의 논문 비율은 정체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로 국가연구개발사업임에도 불구하고 고인용 논문일수록 국내 저자가 주저자인 논문의 비율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적으로 해외 기관의 저자가 주저자인 논문의 비율은 5% 수준이었지만, 피인용 상위 1% 논문에서는 그 수준이 약 27%로 크게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가장 우수한 수준의 성과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공저자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전략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
이같이 현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 따라 정책을 추진하였다면, 이후 목표한 성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병행해야 한다. 예컨대 상기 목표를 위해 출범한 글로벌 공동 연구 사업이라면, 지원 사업 내에서 최우수 연구 성과 창출 수준과 국내 연구진의 주 저자 비율 등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목적한 바와 달리 낮은 수준의 연구가 수행되거나 공저자 수준의 참여만 빈번하다면 이에 대한 정책 수정이 필요할 것이다.
배가 파도치는 방향대로 떠다닌다면 그것은 항해가 아니라 표류이다. 요즘같이 넓고 험한 바다에서는 근거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과기정책은 파도에 따라 정처 없이 표류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과기혁신정책은 과학기술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사업화 등 경제적 파급효과를 강화하며, 인구 변화와 글로벌 경쟁 환경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등 다양한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각 목표를 향해 의미 있는 전진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증거 기반의 체계를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기혁신정책 전반의 증거 기반 토대를 강화하기 위한 국가 종합 전략을 마련하고, 국가 데이터 구축 및 활용 방식, 진단·분석 체계, 정책 환류를 위한 협력 체계 등을 고도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