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의 거시경제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2.1%에서 1.5%로 낮췄다. OECD는 미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2.4%에서 2.2%로 하향 조정하긴 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하향 조정폭이나 성장률 수치, 모든 면에서 훨씬 더 부정적 시각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울 강남 지역의 집값은 다시 올랐고, 가계부채는 또 늘고 있다. 경제가 위축되면서도 불균형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저성장과 불균형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바람직한 거시경제정책 조합은 무엇인가?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비롯한 확장적 재정정책이 우선적으로 필요한가, 아니면 금리를 인하하는 것이 중요한가. 최근 일부 국책 연구기관 전문가들은 추경보다는 금리인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고, 반대로 한국은행은 금리정책은 한계가 있으니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국경제의 문제가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더 심각한 것인지, 어떤 처방이 필요한지 등의 문제에 대해 거시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블록버스터' 경제의 정책 기조와 현실
바람직한 정책 대안을 찾으려면 무엇보다 한국경제가 처한 현실을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2024년 8월까지만 하더라도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서 한국경제는 '블록버스터'급으로 잘나간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왔었다. '한국경제가 이렇게 잘나가는데, 우리 국민들이 잘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의아하다'는 식의 인식이 엿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았지만, 정책 결정자들의 인식은 나름의 일관성을 보였다. 일단 한국경제가 잘나간다고 판단하면, 재정을 확대할 이유는 크게 줄어든다. 지난 여름에 정부가 만들었던 2025년 예산안을 보면, 지출 증가율이 3.2퍼센트로서 명목성장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긴축적 성격을 가짐을 알 수 있다. 경제가 잘나간다고 믿는 상황에서는 정책당국이 재정을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현 정부가 추진해온 '작은 정부' 정책들이 결국 '블록버스터' 경제를 가져왔다는 믿음이 정책기조에도 반영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블록버스터' 경제관은 지난 몇 년간 진행된 긴축적 재정정책과 감세정책이 한국경제의 체질을 강화시키고 성장잠재력을 높였다는 암묵적 인식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경제성장을 위해 정부가 할 일은, 재정지출을 늘리는 것보다 상속세율 인하 등 추가적인 감세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작년 7월 기획재정부가 2024년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2퍼센트에서 2.6퍼센트로 높였을 때에도 이런 인식은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1월에 발표된 한국은행의 GDP 속보치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경제성장률 실적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 2.0퍼센트로 낮아졌고 기업들의 설비투자는 2년 연속 경제성장률을 밑돌았다. 감세가 기업의 투자를 늘릴 것이라는 정책당국 및 일부 전문가들의 예측과는 크게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블록버스터라는 말이 나오기 어려워진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 즉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저성장 국면은 어떻게 봐야 하나. 만약 '작은 정부'가 한국경제를 '블록버스터'로 만들었다는 판단이 정말 맞다면 현재의 어려움은 대외적 불확실성 등에 기인한 일시적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작은 정부가 그렇게 효과적이었다면 기존 기조의 틀을 바꿀 수 있는 재정 확대보다는 금융 완화로 대응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반면, 한국경제의 저성장과 불균형이 구조적 문제라면 금융 완화는 근본적 처방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어느 시각이 더 현실적인가.
◆한국경제의 저성장과 불균형, 금융 완화로 해결할 수 있나
이제 한국경제가 처한 냉정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주력 산업들의 경쟁력 위기, 누적된 민간부채, 저성장 국면의 장기화 등을 감안하면 '블록버스터' 경제관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경제의 문제들을 보수적 재정 운용 기조를 견지하면서 금융을 완화하는 정책조합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의 민간부채는 2024년 3/4분기에 국내총생산의 247%에 달한다. 특히 가계부채는 국내총생산의 90%를 넘는 수준으로 몇몇 복지국가들을 제외하면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국민소득에 비해 부채 규모가 너무 크다. 부채에 더 많이 의존하는 방식의 정책은 과중한 원리금 상환 부담 때문에 소비를 오히려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금융 완화의 효과는 누적된 부채의 크기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가계부채가 일정 규모 이내에서 늘어날 때에는 차입자들의 지출이 증가해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지만 부채가 어느 임계치를 넘어 너무 많아지면 원리금 상환 부담 증가로 인해 차입자들의 지출이 오히려 줄어들면서 경제가 위축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금융당국도 부채 축소 노력을 일정 정도 기울이기는 했지만 현재의 높은 부채 비율을 보면 그동안 부채 축소, 즉 디레버리징(deleveraging)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디레버리징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한국에서 금융 완화는 주로 부동산 부문을 통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부동산 담보대출이 금융 완화의 주된 수단이었기 때문에 부채 축소는 부동산으로 흘러 드는 돈을 줄여 부동산 가격의 하락을 가져올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을 정부가 감수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정부는 부동산 시장이 위축될 때마다 알게 모르게 부양책을 내놓는다. 갖가지 공적 보증, 정책 대출, 규제 완화, 세금 감면 등이 동원된다. 이렇게 집값을 인위적으로 떠받치는 정책들은 부동산이 안전하다는 신화를 더욱 강화시킨다.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사실상 정부의 개입을 통해 뒷받침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동산 불패가 영원히 지속가능한 것은 아니다. 부동산 부문의 거품이 심해질수록 거품 붕괴와 금융위기의 가능성은 커지고, 만약 금융위기가 일어나지 않고 거품이 그대로 굳어지면 청년층의 주거난과 저출산이 심화돼 또 다른 차원의 위기가 발생한다.
이렇게 금융 완화가 정부가 뒷받침하는 부동산 부문을 통해 이루어지면 경제의 불균형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인구가 감소하고 지방이 소멸하는 상황에서 부동산 부문으로 투입되는 자금은 서울 강남을 비롯한 인기 지역으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지역 간 불균형, 세대 간 불균형 등 갖가지 불균형이 확대된다. 즉, 금융 완화는 현실적으로 부동산을 담보로 한 가계부채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상황인데, 이러한 방식의 금융 완화는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불균형을 완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 대한 대출은 어떤가. 사업자들에게 금융 비용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자영업자 부채가 1000조원을 넘고 연체율이 계속 상승하면서 폐업이 줄을 잇는 상황에서 무분별하게 빚을 더 늘려서 버티게 하는 것은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결국 미래의 빚 부담만 더 키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많은 사업자들이 좀비화되면 자영업 생태계에도 부담이 되고 해당 사업자들도 갈수록 재기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
결국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 '빚내서 집사라' '빚내서 버텨라' 식의 금융 완화는 한국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떤 정책조합이 필요한가. 우선 금융 부문에서는 누적된 부채가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으므로 질서 있는 디레버리징이 아직도 중요한 과제라고 봐야 할 것이다. 현 시점에서 금융 완화는 부채 조정과 건전성 강화가 수반되지 않으면 효과가 제한되고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금융 완화의 효과가 제약될수록 재정정책의 중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재정정책은 특히 최근의 글로벌 경제 상황 변화와 산업정책 필요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정책수단이 된다.
◆채무조정 활성화와 금융 건전성 강화
우선 질서 있는 부채 조정은, 과거에 누적된 과도한 부채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채무 조정 제도가 활성화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부채는 가계부채와 중첩되면서 경제 활성화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정부가 새출발기금을 만들어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채무조정을 돕고는 있지만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코로나19 당시 누적되었던 부채에 대해서는 정부가 책임감을 갖고 해결책을 강화해야 한다. 다른 나라들에서 재정으로 지원했던 부분을 우리나라에서는 '빚내서 버텨라'는 식으로 금융 지원으로 대신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부분을 잘 계산해서 정부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기업부채를 조정하는 데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10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문제를 해결했던 사실을 돌이켜보면,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부채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울러 금리가 낮아진 상황에서 과도한 부채 누적, 특히 가계부채의 누적이 추가적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금융 건전성 규제를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 DSR 규제를 원칙에 맞게 해야 하며, 각종 규제 사각지대를 가능한 한 줄여 나가야 한다. 부동산 시장으로 투입되는 정책자금이나 공적 보증도 원래 취지에 맞는 수준으로 운용해야 하고, 이를 경기 부양의 수단으로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23년 특례보금자리론 40조원, 2024년 신생아특례대출 27조원이 개개인에게 도움을 주려는 좋은 의도에서 풀렸겠지만 거시적으로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키우고 유지시키는 힘으로 작용해 청년층과 취약계층의 주거비 부담을 더 늘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근본적으로 '빚내서 버텨라' '빚내서 집사라' 방식의 정책 기조를 지양하고, 재정이 할 일은 재정이 하면서 금융 자원을 생산적인 곳으로 유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적극적이면서도 중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재정 운용
결국 지금의 현실에서는 재정이 한국경제의 저성장과 불평등 해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재정이 시급히 할 일은 위축된 내수의 회복을 돕는 것, 그리고 글로벌 환경 변화로 위기에 처한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질소득의 감소와 불확실한 경제환경으로 위축된 내수를 살리기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재정을 운용해야 할 것이고, 글로벌 차원의 산업정책 경쟁에서 뒤지지 않도록 혁신 투자를 촉진하는 데에도 재정이 적절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건전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재정을 소극적으로 운용하고 대신 금융을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 과거 한국 정책당국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금융 부문은 위험한 기술혁신보다는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부동산 부문에 돈을 넣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지대추구 경제였고, 그것이 저성장과 불평등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저성장과 불평등은 기회의 축소, 그리고 기득권이 없는 청년층의 어려움을 가져와 저출산을 심화시키고 세수 기반을 잠식한다. 이렇게 재정 건전성을 높이고자 하는 시도가 오히려 재정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적극적 재정 운용이 반드시 재정 건전성의 악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재정을 생산적인 부문의 마중물로 잘 활용하고 필요한 인프라 투자를 늘리면 세수 기반을 강화하면서 재정의 지속가능성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에 대한 선제적 투자가 중요하다. 꼭 필요하지만 민간이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분야, 리스크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분야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질 수 있다.
한국경제 성장률의 장기 추세를 보면, 서울대 김세직 교수가 지적했던 '5년 1퍼센트 포인트 하락의 법칙' 즉 5년마다 경제성장률이 1퍼센트 포인트씩 하락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관찰되고 있다. 최근 이 경향은 더 강화되고 있다. 미국보다 1인당 소득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미국의 성장률보다도 성장률이 낮게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길 문제는 아니다.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기만 해서는 저성장과 불평등의 함정을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