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연 산업부 유통팀장
중국의 두번째 통일 왕조인 전한(前漢) 시대,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흉노 왕에게 바쳐진 원제(元帝)의 후궁이 한 명 있었다. 중국 4대 미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이다. 왕소군의 애상은 후세 화가들과 시인들이 남긴 그림과 시로 전해진다. 그 중 당(唐)나라 시인 동방규의 '왕소군의 원한(昭君怨)'이라는 '소군원삼수(昭君怨三首)'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오랑캐 땅에는 화초인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는 쓸쓸함을 담은 시구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음을 의미하는 '춘래불사춘'의 유래다.

유통가는 요즘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작년에 터진 티메프(티몬·위메프)의 대규모 미정산 사태의 후폭풍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대형마트 홈플러스에 이어 명품 플랫폼 발란까지 기업회생(법정관리)절차에 들어갔다.

작년 1조원대 미정산 사태를 일으킨 티메프는 현재 새 주인을 찾는 과정에 있다. 미정산금 회수를 원하는 채권단 설득 작업 등이 남아있어 난항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최근 신선식품 새벽배송 전문기업 오아시스가 티몬 인수예정자로 선정됐고, 위메프의 경우 치킨 프랜차이즈 BBQ가 인수의향을 밝힌 상태다.

티메프 여파로 유통업에 대한 '투자 한파'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올해엔 홈플러스·발란이 기습적인 기업회생절차 돌입이라는 '얼음물'을 끼얹었다. 국내 2위 대형마트인 홈플러스는 지난달 4일 기업회생 절차를 개시했다. 서울회생법원 회생4부(재판장 정준영 법원장)는 홈플러스로부터 2조7000억원 규모의 채권자 목록을 제출받은 상태다.

발란은 일부 입점 판매자에게 판매대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한 채 지난달 31일 갑작스럽게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4일 기준, 발란의 상거래 채권 약 187억9000만원 중 176억9000만원이 미정산 대금이다.

티메프 사태 이후, 안 그래도 유통사들의 IPO(기업공개)가 줄줄이 연기·무산되던 상황에서 투자 심리는 더욱 위축될 것이라는 게 업계 우려다. 투자 유치, IPO 등을 위해선 시장에서 기업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데 유동성 폭탄이 연이어 터지고 있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투자를 유치한 이커머스 기업들조차 불안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불안감이 커진 투자사들이 추가 제약 조건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장에서 만난 유통기업 종사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홈플러스와 발란의 법정관리 돌입으로 온·오프라인 유통 플랫폼 전반에 대한 불신이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물가, 경기침체 속 소비심리가 크게 위축된 가운데 여기서 더 소비자들이 발길을 끊고, 투자까지 끊기게 되면, 업(業)의 존망 자체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신 확산을 막기 위한 몸부림은 이미 시작됐다. 명품 플랫폼 머스트잇은 최근 입점사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최근 2주간 구매 확정된 거래에 대해 익일(영업일 기준) 선(先)정산을 진행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커머스 11번가는 발란의 기업회생절차 개시로 어려움을 겪는 판매자들에게 빠른 정산과 판촉을 지원하고 나섰다. 명품 버티컬 서비스 '우아럭스'에 입점한 판매자 중 국내 사업자로 등록된 발란 피해 판매자를 대상으로 '11번가 안심정산'을 우선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해당 판매자의 수입 명품 카테고리 상품을 대상으로 하루 최대 1000만원까지 빠른 정산을 지원한다.

티메프, 홈플러스, 발란 등 수차례 터진 '폭탄'으로 인한 신뢰도 하락에 이커머스 등 유통업계로의 투자금 유입이 아예 말라버리게 되는 상황을 막아보려는 몸부림으로 읽힌다.

싸락우박이 내리고 돌풍이 몰아친 올해 사월의 날씨처럼, 지금 유통가는 봄 '온기'가 아닌 불안·불신으로 인한 '한기'가 돌고 있다. 춘래불사춘이다.

김수연기자 newsnew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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