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경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을 통해 경제 발전과 기술 혁신을 이루었지만,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의 도약은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글로벌 과학기술 의제 설정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에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과학기술 의제를 생산하고 선도하는 국가로 자리 잡아야 하는 이유와 그 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의 과학기술 역량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지만, 글로벌 과학기술 의제 설정 과정에서는 여전히 후발주자다. 지금까지 국제사회에서 다루는 과학기술 의제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것을 수용하고 대응하는 형태였다. 이로 인해 국내 정책과 글로벌 의제 간의 간극이 발생하고, 국제 논의에서 한국의 영향력이 제한됐다.

특히, 글로벌 기술표준 및 과학기술 규범 설정 과정에서 선진국들이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 한국은 이에 맞춰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더욱이, 한국에게 중요한 글로벌 이슈라 하더라도 국제 논의 초기 단계에서 참여 기회가 부족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논의가 상당히 진행된 후에야 참여하면, 한국적 맥락을 반영하기 어렵고 국익을 고려한 조정도 쉽지 않다. 결국, 이러한 구조적 한계로 인해 한국은 글로벌 과학기술 이슈에서 계속해서 수동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글로벌 과학기술 의제 생산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국내 과학기술 정책과 글로벌 의제 간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지금까지 글로벌 의제는 국내 과학기술 정책과 별개로 다뤄지며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글로벌 의제는 단순한 대응 대상이 아니라,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한 초국가적 협력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둘째, 한국이 주도적으로 '이머징 이슈'(emerging issues)를 발굴하고 글로벌 의제로 발전시켜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논의되기 전 선제적으로 연구하고 정책적 대응을 준비하면, 해당 이슈를 주도적으로 다룰 수 있다.

셋째, 글로벌 의제를 확산할 적절한 국제 협의체를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G7, OECD, EU는 새로운 글로벌 의제가 형성되는 무대이며, G20과 APEC은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유네스코와 유엔 기구들은 특정 의제를 국제 규범으로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은 이를 고려한 맞춤형 의제 설정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넷째, 글로벌 과학기술 의제 생산은 이제 정부만의 역할이 아니다. 연구자, 연구기관, 기업, 시민사회 등 다양한 주체가 국제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 기술 표준, 연구윤리 등 글로벌 연구 생태계의 핵심 논의에 국내 연구계가 적극 기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산·학·연·관이 모두 협력하여 국익과 국제사회의 요구를 반영한 글로벌 의제 생산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향후 한국이 글로벌 과학기술 의제 생산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2025년 APEC 의장국, 2026년 OECD 가입 30주년, 2027년 유엔 SDG 서밋 등 주요 국제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다. 이러한 '정책 창'(policy window)을 선제적으로 활용하면 한국이 글로벌 과학기술 의제를 선도할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은 글로벌 과학기술 의제에 대응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의제를 설정하고 국제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 글로벌 과학기술 의제 생산국으로 도약하는 것은 국가의 장기적 경쟁력과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과제다. 이를 위해 정부, 연구기관, 기업, 학계가 긴밀히 협력하여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높이는 전략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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