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1인 권력집중 87체제 극복 공감 단 한사람만 반대, 소극적 야당이 변수 권력구조 논의 치우치면 또 '괴물' 낳아 지방분권으로 국가패러다임 전환도 방법
그해 초여름 "호헌 철폐, 개헌 쟁취"라는 함성이 거리에 넘쳐났다. 4·13 호헌조치에 반발한 6월 항쟁은 결국 6·29선언을 이끌어냈고, 대통령 직선제가 한국 땅에 정착됐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시작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승자독식 구조라는 '괴물'이 탄생할 것을 예상한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38년이 흐른 지금, 각계에서 개헌론이 분출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이 임박한 가운데 정치권은 물론 시민단체, 학계 등을 중심으로 7공화국 개헌 논의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는것이다.
1987년 제9차 개헌으로 출범한 6공화국은 직선제와 함께 5년 단임제를 도입해 장기집권을 막는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통령 1인에게 과도한 권한이 부여되면서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는 요구가 확산돼 왔다. 특히 12·3 비상계엄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이 또 드러나면서 '분권형 개헌'에 힘이 실리고 있다.
탄핵의 기로에 선 윤 대통령 스스로도 임기 단축 개헌과 함께 내정은 국무총리에게 맡기겠다는 방침을 밝힘으로써 개헌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여야 정치 원로 9인이 한목소리로 개헌을 공개 촉구하고 나섰다. '국가 원로들 개헌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원장 강원택)이 주최한 지난 4일 토론회에서다. 정관계에서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은 정세균·박병석·김진표 전 국회의장, 정운찬·김황식·이낙연·김부겸 전 국무총리, 정대철 헌정회장과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참여했다. 이들은 "지금이 아니면 개헌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민주당의 '어떤 분'만 소극적이고, 다 하자고 한다"(이낙연 전 총리)라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겨냥한 발언도 나왔다.
정치권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국민의힘의 자체 개헌특위는 최근 첫 전체회의를 열고 권력구조 개편을 최우선으로 논의하기로 했다. 주호영 개헌특위 위원장(국회부의장)은 "20년째 개헌론이 쳇바퀴만 돌고 있다"며 "대선 후보들은 자신의 개헌 계획을 밝히고 이행을 담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공개 전체회의에서 "대통령제를 유지할 것인지, 지방분권형 개헌으로 대통령 권력을 지방으로 나눌 것인지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론적으로 의원내각제가 맞다는 분도 있었다"고 전했다. 회의에서는 대통령 권한 일부를 총리에게 넘기는 책임총리제, 지방으로 권력을 분산하는 지방분권형 개헌 등이 거론됐다고 한다.
개헌론 속에서 주목되는 움직임이 있다. 세종시의 행정수도 지위 확보를 위한 개헌과 세종시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지난달 27일 세종시 지방자치회관에서 개최된 '행정수도 및 자치분권 개헌 토론회'에 참여한 교수·전문가들은 헌법 규정으로 행정수도로서의 세종시 지위 확보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우동기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장은 기조강연 '지방 분권과 개헌'에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심화, 비수도권 지방소멸 위기감 확대, 국가 운영 패러다임의 변화 요구 등을 들어 지방분권형 개헌 필요성을 강하게 제시했다. 이어 지난해 시도지사협의회가 지방분권형 개헌 추진 의사를 표명했으며,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에선 지방분권 개헌 결의문을 채택했다고 환기했다.지방분권형 개헌이 시대적 요구인 만큼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순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특임교수는 '행정수도 개헌 및 세종시법 전부개정 논의 필요성'을 주제로 한 기조강연을 통해 지방분권형 개헌 과정에서 세종시의 주도적 역할을 주문했다. 김 교수는 "행정수도 지위도 시대정신과 접점을 맞추어야 한다"라며 "시대정신의 구현과 함께 현재 논의되는 자치분권형 헌법과 세종시법의 전면 개정이 세종시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성공적인 정책 사례가 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행정수도 및 자치분권 개헌 토론회. 세종시 제공
세종시(당시 충남 연기군)로의 수도 이전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재임 때 검토된 바 있다. 2002년 대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가 공약화했지만 '수도는 서울'이라는 헌법재판소 '관습헌법' 결정에 따라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후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더욱 커지면서 개헌론이 제기될 때마다 지방분권형 개헌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여당 개헌특위에서 '지방분권형 개헌'이 수면 위로 나온 가운데 진짜 태풍으로 위력을 키우게 될지. 아니면 이번에도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지 지켜볼 일이다.
개헌안은 이미 수십가지 나와 있다. 공고부터 국민투표. 공고까지 2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헌법학자들은 보고 있다. 여야가 머리를 맞댄다면 순식간에 합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개헌은 미래 권력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런 만큼 차기 유력대권 주자가 반대할 경우 갈 길이 험해진다. "개헌 문제의 핵심은 야당에 있다. 그중에서도 민주당이 개헌 문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의 언급이 많은 것을 함축한다.
개헌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 문제도 관심사다. 세종과 붙어 있는 공주가 지역구인 박수현 민주당 의원은 "모든 차기 대선 주자들이 구체적인 개헌 로드맵을 명확히 발표해야 할 것"이라며 그 단초로 대통령실 이전 문제를 꼽았다.
대통령 제2집무실 완공이 2027년인 가운데 임시로 사용할 만한 공간은 충분한 게 사실이다. 정부세종청사에 총리실 공간이 있고, 보좌 인력 수용도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와 관련,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최근 지도부 회의에서 대통령실의 세종 이전 가능성을 검토해 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기 대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통령실 '세종시 이전론' 카드를 꺼내들은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개헌 논의가 권력구조 개편 놀음으로만 그쳐선 안 될 것이다.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첫 걸음이 되기 위해선 논의의 장이 더 폭 넓고, 깊이 있게 펼쳐지는 것이 절실하다. 세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