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 정치부기자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다."

운명을 예견했을까. 보위에서 쫓겨나기 9일 전, 연산군은 나인들을 거느리고 후원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짧은 시를 읊었다. 이후 눈물을 흘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비웃었다. 그러나 숙용 전씨와 장녹수는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었다. 연산군은 그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고 했다.

당시 숙용 전씨와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온갖 전횡을 일삼아 악명이 높았다. 예상이 맞아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중종반정 직후 군기시 앞(서울시청 광장이 있는 지점)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연산군(재위 1494∼1506년)과 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년)의 묘(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연산군(재위 1494∼1506년)과 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년)의 묘(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연산군 역시 반정 당시 도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결과를 받아들였다. 궁을 장악한 반정세력이 옥새를 요구하자 "내 죄가 중대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며 내줬다.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산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두르지 않고 나와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상(중종)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간다"며 가마에 올랐다.

이후에도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거나 저항한 기록은 없다. 자신 스스로가 폭군이었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재위 당시엔 무차별적인 학살과 엽색행각을 일삼은 왕이었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날 때만큼은 구차하지 않았다.

지난 2월 25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변론 직후 조국혁신당이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내놓았다. "연산군도 울고 갈 역사상 최악의 폭군임을 자신의 입으로 실토했다."

혁신당이 이처럼 격한 논평을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윤 대통령이 자신이 여전히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연산군보다 '자기 객관화'를 하지 않는다. 67분간 이어진 최후 진술에서 12·3 비상계엄에 대해 반성없는 태도를 보였고, '사과'란 단어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죄송'을 2회, '송구'를 1회 언급했을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본인의 탄핵심판 11차 변론에서 최종 의견 진술을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본인의 탄핵심판 11차 변론에서 최종 의견 진술을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미안하다"고 전한 대상 역시 '그날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계엄이 가져온 '역사적 트라우마'로 다시 고통을 받은 사람들도 외면당했다. 오히려 서부지방법원에서 난동을 부리다 구속된 청년들이 사과를 받았다. 법치주의를 부정했어도 대통령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면 인정을 받은 셈이다.

되레 자신의 비상계엄 선포가 내란이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는 "12·3 비상계엄은 무력으로 국민을 억압하는 계엄이 아니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라며 "이 나라가 지금 망국적 위기 상황에 처해있음을 선언하는 것이고, 주권자인 국민들께서 상황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함께 나서 달라는 절박한 호소"라고 거듭 주장했다. 자신이 명령을 내려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 총칼을 든 군인이 난입했는데도, '협박'이 아닌 '호소'를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정치적 운명도 잘 알지 못한다. 탄핵선고를 앞두고 있는데도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승복하겠다는 언급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윤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하게 된다면, 먼저 87체제를 우리 몸에 맞추고 미래세대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한 개헌과 정치개혁의 추진에, 임기 후반부를 집중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기각을 낙관하는 취지의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식 속에 상식이 자리할 공간은 점점 좁아진다. 급기야 거대야당 책임론을 넘어, 야당 의원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행동했다는 주장까지 펼친다. 일부 유튜버들이 주장하는 총선 부정선거 주장을 그대로 '복사'해 말하는 건 예삿일이 됐다.

현재 변론이 마무리되면서 이달 안에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질 예정이다. 이제라도 국민과 역사 앞에 진솔한 자세로 임하면서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자존심과 품위를 지켜나가길 간곡히 당부한다.

김세희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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