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병일 플루토미디어 대표
'법 주도 사회' 대한민국인가. 사회에 '소송, 입법, 법대로 만능주의'가 심화하면서 의료 등 기간 시스템이 흔들리고, 정치의 진영화·분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국가의 미래 준비에도 큰 차질을 초래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당혹스러운 뉴스가 보도됐다. 소방관들이 인명 구조를 위해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갔는데, 주민들로부터 '손해배상' 요구를 받아 800만원을 배상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는 기사다.

지난 1월 11일 새벽 2시 52분, 화재가 발생한 4층짜리 빌라에 출동한 광주 북부소방서 소방관들. 그들은 연기로 의식을 잃은 거주자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 응답이 없는 6개 세대의 문을 강제로 열고 구조에 나섰다. 소방관들이 불을 낸 것도 아니고, 요청을 받고 위험을 무릅쓰고 불 속으로 뛰들었는데, 돌아온 것은 감사 인사가 아니라 돈을 물어내라는 주민들의 요구였다. 이러면 앞으로 누가 소방관을 하겠으며, 하더라고 누가 자신의 생명과 손해배상 리스크를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구조활동을 하겠나. '적당히 하라'는 사회적 합의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나중에는 소방관들에게 '이렇게 했으면' 더 빨리 불을 껐거나 옆방에 쓰러져 있던 사람을 찾아낼 수도 있었는데 못했다며 과실치사죄로 소송을 하거나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어 보인다.

의료 현장은 이미 이런 모습이 일상이 되었다. 소송 급증과 현실을 무시하는 수사와 기소, 판결로 응급의학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산부인과 등 생사가 걸린 급박한 치료를 하는 필수과들은 멸종될 위기에 직면했다.

너무 많으니 2월 사례만 보자. 19일 대구경찰청이 이마가 찢어져 응급실을 찾은 A씨가 병원 3곳을 옮겨 다니다 숨진 사건에 대해 의료진 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A씨는 응급실에 걸어 들어왔고 의료진의 질문에 대답하며 가끔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의사들은 위중한 환자를 보고 있거나 성형외과 전문의가 없어서 다른 병원으로 보냈다. 그런데 밤새 다른 응급환자들을 치료했던 의료진은 하룻밤 사이에 피의자가 되어 검찰 조사실을 왔다갔다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들은 언제까지 응급실 근무를 하려 할까. 일하는 동안에는 형사기소와 손해배상 리스크를 무릅쓰고 적극적인 치료에 나설 수 있을까.

5일에는 광주고등법원이 데이트 폭력을 당한 후 병원에서 사망한 피해자의 유족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폭력 가해자와 의료인 및 병원에 공동불법행위가 성립된다며 4억4000여만원의 공동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했다. 마취통증의학과 1년차 전공의인 B씨는 피해자를 폭행한 피의자가 아니다. 응급치료를 요청받고 긴박한 상황에서 처치를 하던 의료진이었다. 광주 북부소방서 소방관들과 비슷한 경우다.

하지만 한 청년 전공의는 가해자가 손해배상을 하지 않을 경우 4억원이 넘는 거액의 배상책임을 지게 됐다. 이 역시 '적당히 하라'는 사회적 합의인가. 2024년 2월 현재 전국 대학병원의 흉부외과 전공의는 단 6명 남았다.

정치에서는 '법 주도 정치', '정치의 사법화·진영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정당과 정치인들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고소 고발 싸움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탄핵까지 남발되며 정치를 사법기관에 '의뢰'하고 있다. 이는 '사법의 정치화'로 이어졌고,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높아졌다. 복잡한 사회의 문제들을 입법으로 한 칼에 해결하겠다는,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는 무모한 법안들도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미래 준비도 문제다. '법 주도 사회' 현상은 한국이 급변하는 기술 환경과 지정학적 환경속에서 반도체, AI 등 미래를 준비하는데 발목을 잡고 있다. 검찰이 2018년 압수수색을 하면서 시작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 회계 의혹' 사건은 1, 2심에서 혐의 19개에 대해 모두 무죄판단을 받았다.

무리한 기소였다는 의미인데, 삼성전자가 무려 만 6년 이상을 이 소송에 매달리는 동안 한국의 핵심산업인 반도체의 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정치권에서 미래에 대해, 첨단산업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모습을 본 적은 있었나 의문이다. 과거지향적, 퇴행적인 논의에만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에서 법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역지사지에 의한 상호 이해, 대화와 타협이 우선이다. 지금처럼 '법 만능주의'가 지속되면 더이상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는 기간 분야 종사자들은 떠나고 정치는 갈등만 격화될 것이다. 사회가 차분히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한국이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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