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산업부장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말로 유명한 고(故)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삼성은 세계 일류 기업으로 가는 첫 번째 길로 '인재'에 주목했다.

이후 공채 전공시험을 폐지하고 학력 제한을 없애는 등 인사 시스템을 혁신했고, 그러자 삼성에는 우수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입사 기준은 학력이 아니라 실력"이라고 강조했고, 그 결과 소위 비(非)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 최고경영자(CEO)들이 속속 등장했다.

2003년에도 이건희 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천재 경영'을 강조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시가총액 1위이자 세계 반도체·가전·스마트폰 시장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하는 삼성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삼성의 경영시계는 사실상 멈춰졌다.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줬던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삼성을 이끌게 된 이재용 회장은 2016년 말부터 최근까지 사법리스크에 발목이 묶였다. 560일간 구속 수감됐고, 서초동 법원에 출석한 것만 따져도 100여차례에 이른다.

이제 10년에 이르는 이 길고 길었던 사법리스크의 악몽이 사실상 끝났다. 삼성물산 부당합병 관련 항소심서도 패소한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할 수도 있지만, 법조계에서는 1~2심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10% 안쪽이 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의 리더십은 지금부터다. 2심 무죄 선고가 나오자 재계와 주요 언론들은 초대형 인수·합병(M&A)을 기대하는 목소리를 쏟아냈다. 사법리스크에서 해방된 것은 이 회장에게 다행이지만, 부담감은 한층 더 커졌다.

특히 삼성전자의 3대 주력 사업인 반도체와 스마트폰, 가전 사업은 급변하는 통상환경과 중국 등 후발주자들의 거센 도전, 그리고 인공지능(AI)이 촉발한 4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밀려나고 있다. 이 회장 역시 이를 인식한 듯, 선고 다음날 곧바로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과 3자 회동을 하는 초광폭 경영행보를 시작했다.

재계에서는 삼성이 이 같은 거센 변화의 물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또 한번 모든 것을 바꾸는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사실 이 회장은 이미 10년 전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2016년에 직급 체계를 기존 7단계에서 4단계로 줄이고, 실리콘밸리식 인사·경영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조직 혁신을 추진했었다.

이후 수년이 지났지만 제도만 바뀌었을 뿐, 조직 문화에 스며들진 못했다는 게 정론이다. 노사 관계는 더 악화됐고, 많은 인재들이 돈을 찾아 경쟁사로 떠나고 있는 것이 삼성전자가 처한 작금의 냉혹한 현실이다.

이는 비단 삼성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대기업이 처한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직급은 사라졌지만 성별과 국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인재 중용 사례는 가뭄에 콩 나듯 찾아보기 어렵다. 영입했던 주요 AI 석학들이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도 있었다.

사법리스크에서 해방된 지금, 이 회장의 리더십은 지금부터 정말 시험대에 올랐다. AI로 촉발된 4차 산업혁명 속에서 글로벌 브랜드 '삼성'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애플과 구글을 뛰어넘는 과감한 혁신이 필요하다. 게임용 그래픽카드를 만들던 엔비디아가 AI의 대표주자로 도약한 것은 시대적 흐름도 있지만, 그 이전에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로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70배 이상 치솟았고, 반대로 삼성전자의 시총은 최근 3년 새 200조원 가까이 빠졌다. 자원 빈국인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20년 전 이건희 선대 회장의 '천재 경영'이 지금이야말로 필요한 시점이다.

2심 선고 직후 이 회장의 변호인단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이제는 피고인들이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메시지를 전했다. 탄핵정국과 트럼프 2기 출범으로 한국 경제에 희망이 사라지는 요즘, 더 이상은 기업을 억지로 발목 잡는 검찰의 무리수는 없기를 바란다.

박정일 산업부장 comja7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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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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