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철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1453년 조선 초기 계유년(癸酉年)의 일이다.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은 책사 한명회의 조언을 따라 조카인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반대하는 김종서와 황보인 등 중신들과 가족들을 살해했다. 경복궁 동쪽의 한성부 가회방 일대는 피가 흘러 하천을 이룰 정도였다. 백성들은 붉은 피의 흔적을 지우고자 재를 뿌렸다고 한다.

헌법재판소가 위치한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572년 전 일어난 일이다. 역사는 흘러 재동은 또 다른 역사적 갈등의 현장이 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변론기일마다 탄핵 찬성·반대 집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심화되는 정치적 양극화 지형에다 헌법재판소에 대한 불신마저 생기면서 어떠한 판결에도 수긍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마저 생기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1988년 설립 이후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고, 인권의식이 결여된 구시대의 법률에 대한 위헌판단으로 존재감을 키워왔다. 탄핵심판은 독단적인 권력 행사, 자의적 권력 남용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왔다. 하지만 대통령과 국무위원의 탄핵처럼 정치적 이슈에 대한 판단을 묻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존립의 정당성 위기까지 내몰리고 있다.

최고 주권을 가진 국민 다수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을 선출되지 않은 사법 엘리트가 파면시키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그렇기에 절차적 무결점과 국민 지지는 필수적이다. 만약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거나 여론이 팽팽하게 나눠질 때에는 사법기관에 대한 평소 신뢰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사법기관은 평소 호의적 태도 혹은 '선의의 저수지'(reservoir of favorable attitudes or goodwill)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민이 헌법재판소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갖고 있다면 어떠한 결정이든 수긍하게 된다. 설사 다수의 의견과 반하는 결정이라도 존중한다. 하지만 신뢰가 없다면 어떠한 판결이라도 거부감을 갖게 된다. 선의의 저수지는 사법기관의 권위와 독립성을 지켜주는 필수 요인이다.

헌재 재판관 임명은 정치적 후견주의에 바탕을 둔다. 대통령 추천 3인과 대법원장 추천 3인, 국회 추천 3인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기에 대법원장 추천 3인 역시 대통령의 의지가 어느 정도 반영되거나 비슷한 정치적 이념을 가진 인사로 구성된다. 재판관의 개인 성향이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지금 재판관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명수 전 대법원장의 '사람들'과 민주당 추천 인사가 다수를 이룬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문형배, 이미선 재판관을 임명했고,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김형두, 정정미 재판관을 지명했다. 반면 윤 대통령은 정형식 재판관을, 조희대 대법원장은 김복형 대법관을 지명했다. 탄핵소추 이후 정계선(민주당 추천), 조한창(국민의힘 추천) 재판관이 합류했다. 추천자의 성향에 따르면 진보 5대 보수 3의 구도이다.

재판관의 엄격한 도덕성은 국민 신뢰를 얻는데 도움이 된다. 반면 재판관 개인의 그릇된 행적은 신뢰를 저하시킨다. 지금 재판관들은 주식투자로 조롱받고, SNS를 통한 잦은 정치적 의사 표현으로 국민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우리법연구회'라는 특정모임 출신이 많은 것도, 재판관 가족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재판관의 처신이 국민 눈높이에 미달하면서 사법 엘리트에 대한 세상의 존경과 존중은 사라지고 있다.

지난달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심판 선고는 윤 대통령 탄핵심판의 예고편이 된다. 취임 이틀 만에 탄핵 소추된 이 위원장에 대한 헌재 의견은 4대 4로 갈렸다. 재판관들이 가진 정치적 편향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반면 헌재 심판이 법리적 해석과 판단을 통해 이뤄진다는 믿음은 공허해졌다.

3일은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권 불행사 위헌확인' 사건에 대한 선고일이다. 민주당 추천 마은혁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음에 대한 위헌 여부 판단이다. 헌재는 조직논리로 9인 체제 완성을 도모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법연구회 출신 마 후보의 임명을 반대한다. 마 후보 임명은 개인 정치성향에 따라 대통령 탄핵심판을 진행할 것이라는 우려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대통령 심판마저 법관의 양심과 법률적 지식으로 판단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퍼지는 것을 우선 경계해야 한다. 이는 헌법재판소에 대한 불신을 넘어, 자칫 사법시스템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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