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나라의 엘리스'에서 붉은 여왕은 줄곧 달린다. 붉은 여왕의 세계에서 움직이면 그 주변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리를 지키려면 쉼 없이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힘껏 달려야 겨우 머무르고, 다른 곳으로 나아가려면 적어도 두 배 더 빨라야 한다고 붉은 여왕은 말한다.
인공지능(AI) 시대가 왔다고들 한다. 여느 정보기술(IT)이 그렇듯, 생성형 AI 부상 이전에도 AI 기술은 자동화·효율화를 위해 각 산업 분야에 스며들고 있었다. 갤럽과 텔레스코프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99%가 AI 기능이 포함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지만, 약 3분의 2(64%)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I 일상화는 이미 시작됐다.
더욱 지능화된 생성형 AI 세계에서 빅테크들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진다. 챗GPT 개발사 오픈AI에 총 130억달러(약 18조8500억원)를 투자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윈도에 이어 코파일럿 제국을 꿈꾼다. 구글은 알파고 시절의 왕좌를 탈환하고자 새로운 발표를 쏟아내고, 메타도 AI에 전력하느라 메타버스는 뒷전 같다. 오픈AI 대항마인 앤스로픽에 총 80억달러(약 11조6000억원)를 투자한 아마존, 일론 머스크가 넉 달 만에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10만개짜리 AI데이터센터를 마련한 xAI 등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핵무기의 지위를 일부 대체할 수도 있다고 평가되는 AI를 두고 각국 정부도 달리고 있다. 이달 영국 정부는 AI 분야에 140억파운드(약 24조8000억원)의 민간투자를 유치해 일자리 1만3250개를 창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일본 정부는 2조엔(약 18조6000억원) 규모의 AI·반도체 분야 경기 부양책을 지난해 11월 내놨다.
또한 중국 정부는 2030년 AI 핵심산업 규모 1500억위안(약 30조원), 연관산업 규모 1조위안(약 200조원) 달성 등 'AI 굴기'를 위한 차세대 AI 발전계획을 2017년부터 추진 중이다. 추격을 받는 선도국 미국은 AI 반도체를 중심으로 잇따라 내놓고 있는 AI 관련 대(對)중국 제재를 트럼프 2기 정부 들어 한층 강화해나갈 전망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지난해 11월 내놓은 분석에 따르면, 중국에 이미 추월당한 전기·기계 산업은 물론이고 화학·모빌리티 산업도 따라잡혔으며 그나마 전자산업 정도만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환율도 불안한 가운데, 수출로 먹고 사는 근간이었던 제조업도 흔들린다. 심화되는 초고령화와 양극화로 훗날도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 돌파구에 대한 논의는 계속해왔다. 소프트웨어(SW) 기반 디지털 산업·사회로의 체질 전환을 모색하면서 AI를 비롯한 차세대 먹거리 발굴에 여념이 없어야 할 시기다.
하지만 지난해 연말 계엄 사태와 그로부터 이어진 탄핵 정국,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구속까지 일대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골든타임을 허송세월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 IT 시계는 멈춘 듯하다. 국가AI위원회는 위원장을 대통령이 맡기로 한지라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겠고, 또 다른 직속 위원회인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는 2기 민간위원 모집·구성부터 애먹으면서 지난 정부 4차산업혁명위원회보다도 흐지부지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벌써 일고 있다. 국가정보원의 다중계층보안(MLS) 기반 망분리 규제 개선책도 발표를 앞뒀지만, 이해관계자들을 아우르며 심도 있는 검토와 속도감 있는 추진이 가능할지도 걱정이다.
올해는 공공 IT서비스 분야에도 전면적인 대기업 참여 제한이 해제되는 등 많은 변화가 예상되는 해다. 중국은 물론이고 동남아 국가들보다도 SW 가치 인식과 사업 환경이 뒤떨어지는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출발점으로도 기대된다. 그런 토대가 갖춰지지 않는 한 AI산업 육성 역시 모래성을 쌓는 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배는 빨리 뛰어야 할 시기에 멈춰있을 여유는 없다. 거꾸로 매달아도 시계는 돌아간다. AI와 그 기반을 이루는 클라우드 등 IT 관련 정책에 있어 국가적·초당적 움직임이 유연하고 민첩하게 이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