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동안 배움 씨앗 뿌린 신앨벳트 발자취 13도 누빈 열정, 신여성 교육 이끈 김미리사 자신의 재산을 털어 여성 미래 설계한 손몌리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시작된 현덕신의 사명감
1924년 11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첫 길에 앞장선 이들'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극심한 차별을 받던 100년 전 조선의 여성 중에서 '첫 길'을 개척했던 여성 25분에 관한 기사가 매일 연재되기 시작한다. 그 험한 길을 개척했던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가 본다.
먼저 23년 동안 여자 교육에 바친 신앨벳트 여사를 소개한다. "누구든지 매일 오후 4시에 인사동 조선여자청년회관을 방문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거나 1년 12달 어느 날을 물론하고 비를 들고 구석구석 먼지를 쓸어내며 책상을 정리하고 겨울에도 찬물에 걸레를 빨아 이 틈 저 틈 훔쳐내고 화덕에 불을 피우며 화로에 숯불을 만드노라고 혼자서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이마에 주름살이 잡히고 백발이 성성한 부인 한 분을 반드시 볼 것이다. (중략) 그는 2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오로지 조선 여자 사회에 몸을 바치고 자기의 전 생애를 희생하여 분투 노력하는 늙은 청년 '신 앨벳트' 여사다. (중략) 이제부터 17년 전에 그가 처음 마포에서 학교를 세우려 할 때는 단 두세 명의 여자도 모으기 어렵던 때이다. '우리 여자도 배워야 됩니다. 알 것을 알아야 되고, 사람의 할 일을 하여야 됩니다'하고 혀가 닳도록 발에서 불이 나도록 몇 달 동안을 돌아다닌 결과 겨우 10여 명의 여자를 모은 것이다. (중략) 학교라고는 단칸방에 마루 조각을 깔고, (중략) 지금은 낮에는 인사동 태화여자관에 가서 가르치고 밤이면 인사동 조선여자청년회관에서 낮에 나와서 배울 기회가 없는 여자들을 모아 놓고 1백여 명 학생들을 각각 그 정도를 따라서 가르치게 하며, 매 토요일마다 부인 강좌를 개최하고 보편적 지식을 넓여 주고 혹은 활동사진으로 혹은 부인견학단을 조직해 가지고 실지로 보여서 부인은 양성하여, 첫째 조선에 실업을 발전시키고 생산을 많이 하여 경제계를 바로 잡아보자 하는 것이다." (1924년 11월 22일자 조선일보)
다음은 '13도를 편답(遍踏)하여 여자 교육을 선전한' 조선여자교육협회장 김미리사(金美理士) 여사 이야기다. "그가 나이 어리고 저 멀리 태평양 넓은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갈때에는 아직 조선 사회에서 한 사람의 여자도 임의로 문밖을 나서지 못하던 때였고, (중략) 고국에 돌아온 그는 먼저 서양인이 경영하는 배화여학교에 들어가서 10년 동안이나 철모르는 어린 여자들을 가르쳐 왔으며, (중략)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먼저 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여 조선 여자의 완전한 교육기관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그의 첫 사업이 되었다. (중략) 여자 순회 강연단을 조직해 가지고 13도를 방방곡곡 찾아 다니며 여자 교육의 필요와 자기들의 사업을 선전하였다. 70여 곳의 인사를 방문하였고, 1만여 리의 땅을 밟아 이렇게 저렇게 있는 힘을 다하여 주선한 결과 청진동에 있는 근화학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 1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하여 계급을 밟아 학교에 다니지 못한 학생들에게 속성 교육을 시켜 한편으로는 빨고 다듬고 바느질하기에 볼 일을 못 보는 조선 의복을 개량시키고 뜨거운 햇빛과 추운 바람을 방어할 여자의 모자를 연구하는 등 실제 교육도 또한 시키는 중이라 한다." (1924년 11월 24일자 조선일보)
세번 째는 여자고등학원장 손몌리(孫袂理) 여사 이야기다. "찾아 간 기자에게 손(孫)여사가 말하길, 저는 자선 사업하기를 퍽 좋아합니다. 일찍이 빈민의 자녀들을 위하여 많이 가르쳤고 직업 부인을 양성하여 조선 여자의 생산을 풍부하게 하려고, 생활난이 심한 가정 부인들을 모아놓고 양복 짓는 법을 2년 동안이나 강습을 시켰습니다. 그러노라고 제 수중에 있던 여간한 돈냥은 다 털어 바쳤지요. (중략) 불쌍한 집 아내와 딸들을 위하여 수백 원의 자기 재산을 희생하면서 1년에 한 차례씩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 양복 강습을 시켜서 혹은 어떤 지방에 교사로 보내고 혹은 어떤 상점에 일도 보게 하였으며, 현재 다옥정 자택에 '여자고등학원'이라는 여자의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70여 명의 부녀들을 모아서 보통 상식을 열어 주며 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 준비도 시킨다. (중략) 장차 어떻게 하면 여자의 실업(實業)을 발전시킬까, 어떻게 하면 외국에 나가서 더 배우지 못하는 여자들을 위하여 대학을 설립해 주나 생각합니다." (1924년 11월 25일자 조선일보)
다음은 육체의 병과 정신의 병을 다 치료하는 여자기독청년회장 현덕신(玄德信) 여사다. "일찍이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 벌써 3년 동안이나 동대문부인병원에서 매일 아침마다 여러 간호부들에게 간호학과 생리 위생을 가르치고, (중략) 기독교여자청년회의 회장이 되어 인사동 태화여자관 안에 수십 명의 여자들을 모아놓고 상당한 교사를 고빙하여 매일 2시간씩 영어 강습을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장차 지방에서 올라와 각 여학교에 통학하는 학생들과 직업 부인으로 유숙할 곳이 마땅치 못하여 애쓰는 여러 부인들을 위하여 여자 기숙사를 세울 계획까지도 있다 한다."
그 외에도 안국동 유치원장 유각경(兪珏卿) 여사, 동대문 부인병원 의사 안수경(安壽敬) 양, 진성당의원장 정자영(鄭子英) 여사, 애국부인단 사건으로 철창 생활을 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황애스터(黃愛施德) 양, 조선 음악계의 한 줄기 빛이 되는 이화학당 교사 김앨리스(金愛理思) 양, '바느질 어머니' 숙명여학교 교사 이진혁(李進赫) 여사, '자수 전문가' 정신여학교 교사 박용일(朴容逸) 여사, 음악과 영어로 소문이 높은 배화여학교 교사 박인덕(朴仁德) 여사, 조선의 일류 성악가 윤심덕(尹心悳) 양 등이 소개됐다.
어떤 일이나 사상에 있어 그 시대의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을 우리는 '선구자'(先驅者)라 부른다. 선구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나아가며, 뒤따라오는 이들을 위해 길을 개척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업적과 용기를 기억하면서, 암울한 시대의 진정한 선구자였던 '첫 길에 앞장선 여성들'에게 거듭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