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의, 433곳 규제체감도 조사 기업 53.7% "경쟁국보다 과도" 주 52시간제 전문인력 확보 제약 기술·인력·금융·환경 개선 필요
지난 8월 블룸버그는 "엔비디아 직원들은 주 7일, 심지어 새벽 2시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 하지만, 회사의 높은 급여와 보상 덕분에 퇴근하지 않는다"고 보도한 바 있다. 세계 파운드리 1위 업체인 대만 TSMC 연구·개발(R&D)센터 역시 주7일 24시간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비결은 유연한 노동규제 덕분이다. 미국의 경우 고위관리직이나 전문직 등에 한해 '화이트 칼라 이그젬션'을 적용해 근무시간 규제에서 아예 제외하고 있고, 대만 역시 노사가 합의하면 하루 근무를 8시간에서 12시간까지 늘릴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이런 외국 기업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익명을 요청한 반도체 기업 A사 관계자는 "해외 경쟁사는 밤을 새워가며 연구개발에 매진하고 있는데, 우리는 주52시간 근무제에 발목이 잡혀있다"며 "국가에서 육성하는 첨단전략산업만이라도 근무시간 잔업·특근 이슈에 예외를 적용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BBC(바이오, 배터리, 반도체) 등 첨단기업 433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첨단전략산업 규제체감도 조사' 결과, 우리나라 첨단산업 규제수준이 경쟁국보다 과도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기업이 53.7%로, 응답기업의 절반이 넘었다고 25일 밝혔다. 이어 규제를 이행하는데 따른 부담 여부에 대해서는 72.9%가 부담이 된다고 답했고 규제이행이 수월하다고 응답한 기업은 2.7%에 그쳤다.
규제이행을 어렵게 하는 이유로는 '규제가 너무 많아서'가 32.8%로 가장 많았고 이어 '준수해야 할 규제기준이 높아서(23.1%)', '자료제출 부담이 과도해서(21.8%)', '교육 등 의무사항이 과도해서(11.1%)' 순이었다.
향후 규제환경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전년대비 규제환경이 개선됐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42.7%가 아니라고 답했고 향후 규제환경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는지 묻는 질문에는 46.5%가 부정적으로 답한 반면 기대감이 있다는 응답은 17.2%에 그쳤다.
향후 중점 추진해야 할 규제 개선 분야로는 기술(29.6%), 인력(17.8%), 금융(14.7%), 환경(12.6%) 등의 순으로 꼽혔다. 바이오 분야 A기업 관계자는 "인공지능(AI) 기반 혈당 측정·진단이 가능한 채혈기를 개발했지만 의료기기와 진단의료기기가 합쳐진 복합제품으로 판정받아 중복 인증을 거쳐야 했다"며 "이 때문에 발생하는 비용과 시간이 부담스러운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으로 전문인력 확보에 현실적인 제약이 있는 점도 지적됐다. 현재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여야가 나란히 발의한 반도체특별법은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두고 여야간 이견이 있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주 52시간 예외 규정이 필요성을 담은 자료를 민주당에 제출했으나,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 못한 것 같다"며 "업계에선 연구개발 효율성 증대를 위해 52시간 근무 예외가 꼭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데, 이 조항이 통과되지 않으면 사실상 반쪽짜리 지원법이 될 것이란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매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핵심 공약으로 등장하는 시스템반도체 업계는 R&D 경쟁력 확보가 기업 생존의 핵심 요소인 만큼 더 간절하다.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한 팹리스 업체 관계자는 "업의 특성상 고객사 요구가 있는 시기에는 일이 몰리고,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일이 아예 없는 경우가 잦다"며 "주 52시간 근무제를 한 달 208시간으로 변경하는 등의 변화가 허용된다면 연구개발 경쟁력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 밖에도 연구개발(R&D) 단계에서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첨단산업별 특성을 고려한 재원조달 지원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에 대한상의는 첨단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지속적으로 개선 과제를 발굴·건의할 방침이다. 특히 환경규제는 대한상의·환경부 공동 기업환경정책협의회를 개선 창구로 활용하고, 기업 현장 애로사항을 상시 발굴해 관계부처와 협의할 계획이다.
규제 체감도 조사도 매년 정례화해 지수화하고, 규제 수준을 비교·분석해 정책 과제를 제시할 예정이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앞으로 정부와 긴밀히 협력해 첨단전략산업 분야의 규제 개선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며 "국가 경제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 분야인 만큼 현재 국회에 계류된 첨단전략산업기금법, 반도체특별법, 조세특례제한법 등의 조속한 처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