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럽 등 주요국들이 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력 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정치 논리에 발이 묶여 제자리에만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국내 반도체 산업이 현재에 머물러 있을 경우 글로벌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우려를 보이며, 수백조원 규모의 경제 효과를 위한 대규모 맞춤 투자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19일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지난 10월 제22대 국회 첫 정기국회의 본격적인 법안 심사를 앞두고 건의한 경제 분야 입법 과제는 23개로 조사됐다. 이 중 여야 모두가 공통으로 법안을 발의했지만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은 12개다.
'반도체 특별법'이 대표 법안으로 꼽힌다. 이는 반도체 관련 연구개발(R&D) 인력에 대해 주 52시간 근무 규제를 적용하지 않고,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하지만 주 52시간 규제 예외를 놓고 여야간 시각차를 보이면서 소관 상임위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상태다.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시설에 투자하는 기업에 세액공제를 지원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K-칩스법)의 경우 일몰 기한을 올해 말에서 3년 연장하는 내용이 지난 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여야가 통합 세액공제율을 현행보다 5%포인트 높이기로 한 것이 이번 개정안에는 담기지 않아 '반쪽짜리' 지원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반도체 공장 등의 전력 공급을 위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전력망 특별법)도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으로 연내 처리 여부가 불투명하다. 지난달 대한상공회의소 SGI(지속성장이니셔티브)가 낸 '산업계 전력수요 대응을 위한 전력공급 최적화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송전망 건설사업은 평균 5~6년 이상 지연되고 있다.
문제는 탄핵 정국으로 여야의 균형의 무너지면서 이러한 법안 처리가 후순위로 밀리거나, 재계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윤진식 한국무역협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등 경제 4단체장들은 전날 우원식 국회의장을 만나 반도체 특별법 등 무쟁점 법안의 연내 통과를 호소했다.
국내 반도체 생태계가 정치 논리에 발목이 잡힌 사이 글로벌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 상무부는 반도체 과학법 인센티브 프로그램으로 15개 기업과 예비 계약을 체결하고, 390억달러(56조원) 중 300억달러(43조원) 이상 지원하기로 했다. 재무부는 반도체 제조 ·반도체 제조 장비 생산 기업에 25%의 투자세액 공제 규정 마련을 추진 중이다.
유럽연합(EU)은 작년 유럽 반도체법을 제정하고, 2027년까지 33억유로(5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반도체 제조시설에 대한 투자, EU 전 지역의 반도체 허브 구축, 새로운 반도체 기술 시범 운영, 설계·기술 역량 개선, 기업 자금조달 접근성 확대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산업에 대해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투자 없이는 글로벌 경쟁력이 크게 뒤쳐질 수 있다며 대대적인 맞춤형 투자가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온다.
권석준 성균관대학교 교수는 전날 한국공학한림원이 개최한 '반도체 특별위원회 연구결과 발표회'에서 "정부는 2030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35%를 목표로 제시했지만 현 상황 지속 시 점유율 10% 유지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삼성 원툴로의 국내 파운드리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 지원을 통해 공기업 성격으로 시작한 TSMC와 같이 'KSMC'를 출범시켜 삼성전자에 대한 과한 의존도를 타개하고, 글로벌 시스템 반도체 시장 점유율 확대해야 한다"며 "20조원을 투자하면 10년 후 200조원 이상, 20년 후에는 300조원의 경제 효과가 예상된다"고 밝혔다.장우진기자 jwj17@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