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일제강점기라는 고난의 시기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역경을 딛고 앞선 삶을 살아간 분들이 많았다. 그들의 삶은 단순히 개인의 성공을 넘어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이야기로 남아 있다. 시대를 앞서 살아간 그들의 도전과 열정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먼저 1924년 5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 최초의 여류 영문학자 최덕상(崔悳相) 여사 이야기다. "조선 최초의 여자대학 영문과 졸업은 최덕상(28) 여사가 차지하였다. 여사는 어려서 진명여자보통학교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가사를 보다가, 1920년 봄에 영문학에 뜻을 두고 동경에 건너가 일본여자대학에서 4년 동안 영문을 전공하여 금년 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여사는 조선 여류 영문학자이며 장래는 교육에 힘쓸 희망이라는데, '영문과를 졸업했대야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서가(書架)에는 금자(金字)가 빛나는 영문 서적으로 채워 놓았다."
그런가 하면 조선 식료품으로 미국에서 성공한 분도 있다. "일전에 미국으로부터 명사 유일형(柳一衡) 씨가 입경하여 지금 조선호텔에 체재 중인데, 유씨는 여러 해 전에 중국 길림 지방에 이주하였다가 미국에 건너가 '마쉬갠' 대학 상과에 들어가 다년 상학(商學)을 전심 연구하다가, 졸업한 뒤에 세계 시장에 조선 상품을 소개하고자 '떼뉴로이트' 시에서 조선 간장과 숙주나물을 팔기 시작하여 마침내 큰 이익을 얻어 얼마 전에 그 사업을 주식회사로 조직 변경하여 가지고 온 아메리카 식료품계에 많은 환영을 받아오던 터인데, 그 회사의 주주도 대부분이 미국 사람들인데 장래도 매우 유망한 사업이라 하며, 간장 같은 조선 식료품을 세계 시장에 소개하게 됨은 유씨가 처음이라더라." (1924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
숙주나물로 성공한 분은 또 있다. 1924년 11월 27일자 조선일보에 '2만 원으로 50만 원 회사 창설, 숙주나물 장사로 성공한 고심담'이라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 분이 바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柳一韓) 박사다. "아메리카 미시간주 '띄츠로이트' 시에서 조선 숙주나물을 만드는 회사를 설립하여 성공한 유일한 박사는 해외에서 성공한 조선 실업가 중의 하나이다. (중략) 유씨는 미국 사람들이 청요리집에 가서 숙주나물을 한 번 먹어보고는 도무지 잊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심리를 이용하여 장사를 하면 좋겠다 하고 경영을 해 보고자 (중략) 금년에는 일약(一躍)하여 80만 원어치를 팔게 되었으며, 명년 안에는 200만 원어치 이상 매매는 하게 될 터입니다. (하략)"
16년간 해외에서 'X' 광선을 전공한 정일사(鄭一史)라는 분도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 일찍이 미국에 건너 가서 16년 동안이나 형설의 공을 닦으며 한갓 학업에 힘을 써오다가, 마침내는 미국에 입적까지 한 뒤에 여러 해 동안 군의(軍醫) 생활을 하고 또한 지난번 구주전란(歐洲戰亂, 제1차 세계대전)에까지 출전하였다가 지난 3일 밤에 감개무량한 느낌과 함께 고국을 방문한 청년 신사가 한 사람 있다. 정씨의 현재 이름은 '라이안. 케. 정'으로 본명은 정일사(鄭一史·32)이며 그는 일찍이 경성 태생으로 16살 먹었을 때에 우연히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어 (중략) 미국에서 중학을 마친 그는 또다시 뒤를 이어 가지고 '와싱톤'에 있는 국립 군의대학에 입학하여 특히 'X' 광선과를 마쳤다. (중략)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서 미국 군대에 들어가서 부교(部校)로 군의(軍醫) 노릇을 하다가 하루 아침에 구라파 전쟁이 온 천지를 뒤덮게 됨에 그는 불란서 '부라싸트'라는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전선(戰線)에 달리면서 군의(軍醫)의 사명을 다해 오다가, 얼마 전까지도 미국 중앙 정부 제86 육군 대병원에서 일을 보고 있게 되었다. (중략) 에비손 씨의 소개로 세부란스 병원 X과에서 다섯 해 동안 일을 보게 되어 급급히 미국 정부에 그 뜻을 알린 후에 군대의 직무를 사면하고 지난 달 중순에 미국을 출발해 가지고 고베(神戶)를 거쳐 서울에 들어와서 아직껏 여행 중의 피곤한 것도 모두 없어지기 전부터 세부란스 병원 엑쓰 광선실에서 소매를 걷고 분주히 몸을 놀리는 중이다." (1924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
당시 유일한 무선전신 1급 기사 자격을 가지고 대양을 누비던 한덕봉(韓德奉)이란 분도 있었다. "옛날 장훈학교 출신으로 경성 훈정동 78번지에 본적을 가진 무전전신 1급 기사 한덕봉(30)씨는 고베에 있는 국제 기선 회사 소속으로 오랫동안 항행 중에서 무선통신 사무에 종업하다가, 이번에 뉴욕항으로부터 고베에 돌아오게 된 틈을 타서 수일 전에 입경하여 방금 자택에 체류 중인데 (중략) 당시 일본에는 다만 안중(安中) 무선전신 강습소 하나가 있었으나 처음에 청강생 자격으로 입학 허가를 얻어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여, 8개월 만에 속성과 졸업을 마친 후, 1918년도에 일본 체신청에서 거행하는 사설 무선전신 종업자 자격 검정시험에 입격을 해 가지고 곧 2급 기사의 면허장을 얻은 후에 얼마 동안은 오사카(大阪)에 있는 안본(安本) 기선 회사에 근무하다가 지난 1922년도에 시험을 봐 마침내 1급 기사가 되었다는데, 현재 일본 안에 있는 조선인 무선전신 기사는 모두 세 사람뿐이라는데 그중 1급 기사는 한덕봉씨 뿐이라더라." (1924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
파란(波蘭, 폴란드) 유일의 조선 동포인 유경집(劉敬緝)이란 분도 눈에 띈다. "지금 독일 백림(伯林; 베를린)에 유학 중인 김필수(金弼洙)씨의 전하는 소식에 의하면, 파란의 수도에서 한방의로 생활하는 유일의 동포 유경집 씨는 원산 출신으로 본국을 떠난 지가 벌써 30년이나 된다 합니다. (중략) 제일 처음으로 노서아 땅에서 한방의를 행술(行術)하여 상당한 신용을 얻고 거대한 재산을 모았다가, 노국 제정(帝政)이 뒤집힐 때에 과격파의 손에 재산 몰수를 당하고 장남 동하(東夏)군까지 총살을 당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지금 동거하는 부인(파란 여자)과 같이 5년 전에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발루샤우'에 이주하였다 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한방의로 행세하여 민간의 신용도 얻고 상당한 재산도 모아서 이곳에서 기차로 한 시간쯤 나가는 곳에 농원과 별장을 두고 비복(婢僕)을 부리며 과수를 배양하고, 가금(家禽) 가축을 기르고 양봉까지 하여 자급자족한 생활을 할 뿐 아니라, 1년에 몇백 원씩 본국 가족에게 보낸다고 합니다." (1924년 11월 18일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