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논설위원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린다는 뜻의 고사성어가 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다. 기원전 202년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의 마지막 결전인 해하(垓下) 전투가 벌어졌다. 한신·영포·팽월의 군대가 해하 지역에 고립된 초나라 군대를 겹겹이 포위했다. 항우의 병력은 적었고 식량도 바닥난 상태였다.

극도의 불안과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밤이 깊어지자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초나라 포로들을 일부러 노래하게 하여 항우의 병사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한 것이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밤에 한나라 군대가 포위한 사면(四面)에서 일제히 초나라 노래가 울렸다. 항우는 크게 놀라 말했다.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모두 차지한 것인가? 어찌 초나라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漢皆已得楚乎 是何楚人之多也)"

사면초가는 단순히 적에게 둘러싸인 상황이 아니라, 민심과 신뢰를 잃은 지도자의 고립을 상징한다. 항우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카리스마를 가졌지만,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잔혹한 통치 방식으로 민심을 잃었다. 반면 유방은 민심과 동맹을 얻기 위해 유연하고 실리적인 정책을 펼쳤다. 초나라를 지지했던 백성들은 한나라로 돌아섰고, 항우의 동맹들은 항우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항우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며 운명 탓으로 돌렸다. 항우는 추격해온 한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사랑하는 여인 우희를 따라 자결했다. 그렇지만 그의 몰락은 천명이 아니었다. 그의 통치 방식에 이유가 있었다. 이렇듯 사면초가는 민심을 잘못 읽은 리더는 설사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더라도 패망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오늘날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도 항우가 직면했던 사면초가의 상황에 비유될 만한 국면에 서 있다. 비상계엄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만 고려할 수 있는 극단적 수단이다. 따라서 이번 비상계엄 발동은 국민과 정치권 모두를 납득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계엄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들은 심각한 우려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어두운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저항은 거세게 일었고 결국 비상계엄은 해제됐다. 45년 만의 비상계엄은 불과 6시간만에 막을 내렸다. 윤 대통령은 대혼란을 일으킨데 대해 사과했다. 지난 7일 대국민 담화를 내고 계엄령을 선포해 국민 불안을 야기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법적·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면서 임기 문제를 포함한 향후 정국 안정 방안은 여당에 일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입장부터 퇴장까지, 채 2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준비된 담화문만 읽고 퇴장했다.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비상계엄은 해제됐지만 대통령 리더십에 대한 불신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비상계엄 못지 않은 강도 높은 후폭풍이 용산 대통령실을 때리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은 통과될 때까지 대통령 탄핵안을 계속 발의해서 매주 토요일 표결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항후 국정 운영과 정치 상황의 변동성은 더 커졌다. 경제 불확실성은 한층 증폭될 것으로 우려된다. 한국 경제의 대외 신인도가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면서 지난 9일 금융시장은 '블랙먼데이'를 연출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흐름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내다본다.

비상계엄을 논의하거나 실행할 때는 국민과의 소통이 필수적이다. 윤 대통령의 경우 이러한 과정이 극히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은 분노했고 민심의 급격한 이탈로 이어졌다. 타의에 의해 계엄군으로 동원된 군인들 역시 깊은 자괴감에 빠져있다.

윤 대통령은 항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민심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그것을 잃으면 어떤 권력도 오래갈 수 없다. 윤 대통령에게는 아직 시간은 있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책임있는 '행동의 길'을 선택하기를 기대한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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