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022년 유럽 출장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기술"이라며 기술 경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현한 바 있다. 이 회장은 이후에도 주요 공식성상에서 대내·외 불확실성을 극복할 유일한 방법은 '초격차' 기술 뿐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이 회장의 이 같은 뜻에 따라 기술통 리더를 전면에 배치해 SK하이닉스와의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 격차를 뒤집고 TSMC의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위탁생산) 위상에 도전하기 위한 재정비에 나서고 있다.
HBM에서는 TSMC과의 협업 폭을 확대해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파운드리에서는 효율성 극대화를 통해 수익성을 높인다는 전략이다.
최근 삼성전자는 내년 하반기 출시 예정인 HBM4(6세대)에서는 엔비디아의 '퍼스트 공급사'가 되겠다는 계획을 잇따라 내놨다. 올해 HBM3E(5세대)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뒤처졌지만, HBM4에선 기술 우위를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 삼성의 목표다.
삼성전자는 HBM4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존 고수해 온 '턴키 솔루션' 전략 수정 가능성도 피력했다. 삼성전자는 로직다이(베이스다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TSMC와 협력할 계획이다. 삼성이 로직다이 제작을 외부에 맡기기로 한 것은 자사 파운드리 기술력 부족을 시인하는 의미일 수 있지만, 이는 HBM4에서 절대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힌다.
로직다이는 HBM 맨 아래 탑재되는 핵심 부품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HBM3E까지는 발열 관리와 패키징(후공정)이 주요 과제였다면, HBM4에선 고객사 맞춤형 로직다이가 제품 경쟁력을 가를 요소로 꼽힌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지난 10월 컨퍼런스 콜을 통해 "커스텀 HBM의 로직다이 관련 파운드리 파트너 선정은 내외부 관계없이 유연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HBM4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HBM용 D램 재설계도 진행하고 있다. HBM은 D램을 쌓아 올려 만드는 메모리 반도체이기 때문에, D램 성능은 곧 HBM 성능으로 이어진다. D램 재설계는 시간이 다소 소요될 수 있는 일이지만, 삼성은 근원적 기술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이처럼 결정했다. 여기에는 전영현 삼성전자 DS 부문장의 기술 초격차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업계에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은 선단 공정의 D램을 양산해 내년 하반기 예정인 HBM4에 곧바로 적용할 계획인 것으로 보인다"며 "HBM4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경쟁사를 따라잡기 위해 이처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전략도 과감히 수정해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신규 파운드리 설비 투자는 줄이고, 기존 라인의 수율 확보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삼성의 '2030년 글로벌 파운드리 점유율 1위 달성' 목표도 일부 수정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업계에선 삼성이 단순히 TSMC 점유율을 추격하기 보단 '강한 2등' 전략을 구사해 수익성을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를 위해 파운드리 사업부 최고기술책임자(CTO) 직을 사장급으로 격상하며 변화를 줬다. 삼성은 한진만 파운드리 사업부장과 남석우 파운드리 CTO를 각각 선임해 파운드리 조직을 이원화했다. 파운드리는 양산 기술 뿐만 아니라 고객사와의 긴밀한 네트워크 형성이 경쟁력의 핵심으로 꼽힌다. 한진만 파운드리 사업부장이 미국 빅테크 고객사 확보에 주력하고, 남석우 CTO는 파운드리 미세공정과 수율 확보를 진두지휘하는 체제다.삼성전자는 최근 파운드리 사업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TSMC에 이은 2위이긴 하지만 점유율 차이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수익도 내지 못하고 있다. 올 3분기에 파운드리 사업부가 기록한 적자 규모는 1조5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 파운드리가 '강한 2등' 전략을 구사해 수익성을 끌어 올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며 "미국 정부가 TSMC의 파운드리 독점을 원하지 않는 상황인 만큼, 삼성에게는 분명 기회가 있다"고 밝혔다.박순원기자 ssun@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