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산업부장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되면서 한국 정부엔 비상이 걸렸다. 최근 한 달 여 동안 대책회의만 30번가량 개최했다고 한다. '트럼프 2.0' 내각이 당선 한 달도 채 안돼 속전속결로 구성되고 벌써부터 관세장벽 예고가 물밀듯 밀어닥치고 있으니 비상이 걸릴 만 하다. 그러나 대책이라고 내놓은 결과물은 딱히 없다. 기업들은 정부의 외교통상 라인을 의심하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통상 전문가는 현 정부 외교통상 라인의 정보력이 거의 '깜깜이' 수준이라고 한탄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정부는 물론 국내 주요 언론들도 미국 대선 결과를 박빙으로 추정했고, 심지어 민주당의 승리를 예상한 적도 있다. 그러나 미국 현지의 여론은 이미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 대세가 기울어져있다는 여러 지인들의 증언을 들었다. 정부의 최근 행보를 보면 과연 트럼프 당선인에 대한 대응 시나리오가 있긴 했었는지 의심스럽다.

정부의 부실한 외교통상 능력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곳곳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부산엑스포 유치전 당시 정부는 나름 박빙이라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비롯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까지 총 동원됐으나 결국 시간만 낭비했다. 최근 일본 사도광산에 강제 동원돼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를 기리는 추도식 논란에서도 정부의 외교라인의 무능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우리 조상들을 기리는 행사인데 사전 조율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지금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이 드러난 사례가 아니더라도 여러 실무적인 문제에서 정부의 부족한 정보력을 여실히 체감했다는 기업 대괸 담당자들의 말을 쉽잖게 들을 수 있었다.

더 걱정되는 것은 외교통상 부실이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2.0' 정부 출범 이후 대내·외 통상 환경은 격변하는 중이고, 세계 각국의 보호무역주의와 관세장벽은 한층 그 파고가 높아지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은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치명적이다.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지난주 무역의 날 기자간담회에서 "올 3분기까지 국내총생산(GDP)이 2.3% 늘었는데, 이 중 순수출 기여율이 98.1%로 한국 경제를 이끌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그나마 반도체와 자동차의 수출 호조가 아니었다면 마이너스 성장을 걱정해야 할 지경까지 몰렸을 것이라는 뜻이다.

내년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한국은행은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2.1%에서 1.9%로 하향 조정하며 저성장을 공식화했다. 세계 주요 투자은행(IB) 8곳 가운데 5곳도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1%대로 예상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한계에 수출 불확실성까지 더해지면서 '저성장 고착화'시대가 본격화 된다는 분석이다. 신승철 한은 경제통계국장은 "잠재성장률 하락의 가장 큰 요인은 저출산·고령화 등 인구구조적 변화이고, 생산성 저하와 중국·인도 등과의 경쟁, 세계적 공급망 재편, 기후변화 이슈도 있다"며 "잠재성장률 하락을 완화하거나 잠재성장률을 올리려면 정부를 포함한 경제주체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답답하다. 정보는 없고 정치권은 여전히 관치경제의 유혹에 붙들려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경제계의 강한 반발에도 헤지펀드들의 기업 사냥을 부추기는 상법개정안을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반대로 수출 주력인 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주52시간 근무시간 예외' 조항은 노동계의 눈치를 보느라 법제화가 미뤄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은 독자생존을 위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우 첫 외국인 CEO(최고경영자)를 선임한 데 이어 미국 외교 관료 출신 전문가를 경영 전면에 배치하는 등 대관 역량을 한층 강화했다. 삼성전자도 가장 취약한 분야였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장으로 삼성반도체미주총괄(DSA) 출신을 배치하면서 대미 영업력을 극대화한다는 전략을 보여줬다. 세계 각국이 자국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관세는 물론 보조금까지 가능한 역량을 총 동원하고 있는 와중에 기업들은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차라리 가만히라도 있는게 기업들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한 대기업 임원의 자조섞인 한숨이 생각난다. 박정일기자 comja77@dt.co.kr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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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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