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결코 공정하지도, 평평하지도 않다. 러시아의 기습 침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난 19일로 1000일을 맞았다. 미국 대선에서 조기 종전을 외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으로 휴전을 향한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우크라이나는 한뼘의 영토라도 더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러시아와 북한 간 군사협정 체결과 김정은의 북한군 파병으로 우크라니아 전쟁은 더이상 남의 나라 전쟁만이 아니게 됐다.
개전 후 지난달까지 양국 병력 사망자는 17만명 이상, 부상자는 75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러시아군 누적 사상자는 61만5000명(전사 11만5000명, 부상 50만명), 우크라이나군은 30만7000명(전사 5만7000명, 부상 25만명)에 달했다.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희생자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푸틴이라는 독재자 한 사람의 야심과 오만으로 100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74년전 6.25전쟁을 생각했다. 만약 지금의 우크라이나처럼 당시 민주주의 국가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자인 김일성이 옛 소련(현 러시아)의 독재자 스탈린의 후원 아래 한반도를 공산화시키기 위해 동족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다.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의 결단 아래 미국을 비롯, 영국 프랑스 그리스 호주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튀르키예 등 16개국이 총 34만1000여명의 유엔군을 보내 돕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때까지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전사자 3만7902명, 부상자 10만3460명, 실종자 3950명, 포로 5817명 등 15만1129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한국군(경찰 포함) 희생자는 63만명, 전재민 수는 1000만명이 넘었다.
우크라이나도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제 정전협정을 맺어야 했던 대한민국처럼 종전 협상에 나서야 할 처지다. 국민을 잃고, 영토까지 빼앗긴 상태에서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국제정치의 냉엄함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우크라이나는 대한민국의 지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러시아와 맞서 싸울 무기가 태부족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북한 간 군사협력이 레드라인을 넘어설 경우 살상무기 제공도 고려한다는 게 정부 입장이지만, 트럼프의 당선으로 전쟁 향방이 어디로 튈지 불투명해지면서 정부의 선택도 어려워지고 있다.
더구나 거대 야권이 "우크라이나 전쟁은 남의 전쟁"이라며 우크라이나에 대표단 파견까지 막아선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등은 심지어 우크라이나 전쟁을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자유와 영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러시아와 미국의 대리전으로 규정한다. 6.25전쟁을 북한의 남침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전쟁이 아닌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 민족 내부의 내전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사이비 진보의 민낯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트럼프의 재등장은 우리의 외교안보 전략에도 변화가 있어야 함을 뜻한다. 첫째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다시 침략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1970년대 후반 카터 미 행정부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 할때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안보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에서다.
트럼프는 핵을 써가며 대한민국을 지켜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윤석열 정부가 바이든 행정부와 애써 구축했던 핵확장억지전략은 휴지가 될 수 있다. 트럼프의 뜻대로 방위비를 더 늘려주되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 일본처럼 유사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농축우라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핵재처리 권한을 가져야 한다.
또 하나는 동북아와 국제질서에서 대한민국의 역할 확대 요구에 대한 대비다. 국제사회는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인 경제대국답게 한국이 세계질서 유지에 더 기여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트럼프 2기는 대만을 강제 병합하고, 태평양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중국에 맞서기 위해 더 많은 역할을 하도록 압박할 것이다.
"노예 아닌 자유민으로 살기 위해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의 말은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는 말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