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2021년 젠더혁신센터 출범… 과기법에 성별 특성 반영 내용 포함
중·고생 대상 '와이즈' 프로그램 운영… 여성 과학계 진출 도와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제공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제공
"심혈관질환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남성에게 더 많이 발병하고, 또 남성의 사망률이 더 높은 것으로 알려진 질환이죠. 그런데 사실 여성도 심혈관질환에 따른 사망률이 남성 못지않게 높았다고 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같은 증상을 호소했을 때, 남성의 경우 심혈관질환을 의심해 적절한 치료가 가능한 반면 여성은 심혈관질환보다 다른 병을 우선 고려했기 때문이죠."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만난 이혜숙(76·사진)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은 과학기술에 '젠더혁신'이 필요한 이유를 간단한 예시로 설명했다.

젠더혁신은 과학기술 연구개발혁신 전 과정에 성별(성·젠더) 등 특성 분석을 한 뒤, 기술개발과 상품·서비스에 반영해 경제·사회 전반에 지속 가능한 포용적 가치를 창출하는 전략이다.

연구개발의 젠더 편향성 문제는 이미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1990년대부터 화두에 오른 개념이다. 약물 부작용의 성차 문제가 대표적이다. WHO(세계보건기구)가 1967년부터 2018년까지 수집한 1800만여건의 약물 부작용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보다 약물의 부작용을 약 2배 많이 경험한다. 학계에서는 이런 문제가 약물 개발 과정에서 동물 실험과 임상 등에서 이미 성별 편향이 나타났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 소장은 비단 여성에게만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똑같은 예시로 골다공증이라는 병은 여성에게 위험한 병으로 잘 알려졌지만, 사실 남녀 모두에게 나타나는 병입니다. 특히 고연령으로 갈수록 골감소증으로 인한 위험도는 더욱 높아집니다. 그런데 처음 골다공증을 연구할 때 골밀도의 기준이 '젊고 건강한 백인 여성'으로 잡았고, 그 연구가 표준이 되면서 '고연령 남성'에 대한 위험 기준은 명확하지 않은 겁니다."

미국과 유럽 등은 이미 의·생명분야를 비롯한 연구개발에서 성별 특성 반영을 의무화하고 젠더 요소를 고려한 혁신 과제와 연구를 장려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2021년 젠더혁신센터 출범과 같은 해 개정된 과학기술기본법에 성별 특성을 반영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소장은 과학기술에서의 젠더혁신이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 아닌 지극히 과학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줄곧 강조했다.

"어떤 한 성별이나 특정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편견이나 결함이 없는 연구개발의 성과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센터는 젠더혁신과 관련된 법과 제도 등 정책 활동도 지원하고 있지만, 이런 젠더혁신의 의미를 알리는 인식확대 세미나 등 지속적인 홍보 활동도 추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화여대 수학과 출신의 1세대 수학자인 그는 모교 교수로 여성 인재를 양성하던 것에서 조금씩 관심을 확장해 나간 것이 지금의 젠더혁신센터까지 오게 됐다고 소개했다.

"사실 저는 그냥 좋은 수학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고, 여대 출신으로 여학생을 가르치다 보니 여학생의 커리어가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내 학생들이 수학으로 밥을 벌어먹을 수 있도록, 수학자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으면 했고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죠."

이 같은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이 여성 과학자 양성 프로그램 '와이즈'(WISE) 프로그램이다.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이공계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여성 과학자와 일대일로 맺어주는 멘토링 프로그램이다. 이화여대에서 시작한 이 사업은 더 많은 여성이 과학계에 진출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됐다. 뿐만 아니라 이 소장이 수학에서 과학계 전체의 젠더 이슈로 관심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과학계에서 젠더 이슈가 연구 구성원의 젠더 밸런스였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연구 자체에서의 젠더 밸런스도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쪽으로 넘어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밸런스를 맞춰나가는 연구 분야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최근 이와 같은 편향성의 개선이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분야가 인공지능(AI)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연구가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부작용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장은 현재 국내 AI 연구개발이 다른 나라보다 다소 늦은 점은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나와있는 AI의 단점을 개선하고 형평성을 갖춘 AI 연구개발의 중요성과 이를 지원할 법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법, 제도를 이야기하면 규제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편향성 문제는 법을 통해서라도 최대한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연구개발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편향적인 연구가 편향적인 결과로 이어지면 결국 그것이 사회적 손실인 동시에 경제적인 손실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니까요."

한국은 유럽연합(EU) 최대 연구개발 지원사업 '호라이즌 유럽'에 준회원국으로 참여하게 됐다. 2021년부터 7년간 약 138조원이 투입되는 이 프로젝트에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연구 참여 기관이 과제 수행 기간 성평등을 구현하는 활동을 수립하고 이행해야 한다.

"호라이즌 유럽 참여가 국내 연구계에도 젠더혁신이라는 글로벌 트렌드, 글로벌 스탠다드를 더 빠르게 확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연구 현장에서의 솔선 참여 등이 필요합니다. 센터 역시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과 협업 역량을 더 강화하며 지원에 나서겠습니다."

전혜인기자 hye@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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