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종 ETRI 슈퍼컴퓨팅시스템연구실 연구위원
세계대전의 산물인 애니악(ENIAC)은 인간이 7시간 걸리던 탄도 계산을 3초만에 완료했다. 시계를 빨리 감아 보자.COVID-19가 전 세계에 공포와 혼란을 불러일으켰을 때, 극심한 불안과 긴장 속에서도 전 세계의 유수한 기관들이 슈퍼컴퓨터를 동원하여 주당 1만 개 이상의 물질을 스크린하면서 대처약품으로 가능성 있는 물질합성을 100배 이상의 속도로 완료할 수 있었다. 이는 위기 대응에 있어 슈퍼컴퓨터의 중요성을 알린 최근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초고성능 컴퓨팅 기술'을 활용한 제품인 슈퍼컴퓨터는 강력한 고정밀 계산능력에 기반한 시뮬레이션 성능을 통해 현실에서 실험이 곤란한 원자력이나 우주개발 혹은 생명과학 분야 등에서 국가경쟁력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에는 AI 기술과 접목되어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 대해 빠른 탐색과 정밀한 시뮬레이션의 결합으로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올해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계산단백질 설계'(computational protein design) 기술은 가장 최근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야 세계 시장에서 준독점적 위치에 있는 미국이 경쟁력 유지와 격차 확대를 위해 엑사스케일 컴퓨팅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HPE, Nvidia, AMD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준독점적 상황을 잠재적 위험요소로 인식한 유럽연합(EU)은 기술 주권 확립을 목표로 자체 엑사스케일 시스템 개발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인도 역시 매우 빠른 속도로 슈퍼컴퓨팅 능력을 확충해 가고 있으며, 동남아시아 및 동유럽 등 신흥 시장에서도 확산이 가속화될 것이므로 시장 개척의 여지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첨단 군사기술로 개발된 GPS 기술이 내비게이션 등 생활 곳곳에 스며든 것처럼, 슈퍼컴퓨터에 사용된 기술들이 고성능 서버 및 자율주행 이동체 등 고성능 시스템 분야에 널리 활용된다는 것은 시스템 핵심 구성 요소들을 살펴볼 때 잘 알려진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국가 산업 및 안보에 있어서 전략적 기술로 인식되고 있기에 국가주도 기술개발에 대한 견제도 제한적이므로, 첨단기술 확보 및 산업생태계 강화를 위한 최적의 경로라고 할 수 있다.

정부도 지속적인 인프라 확충을 위해 슈퍼컴퓨터 6호기 도입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메인시스템을 도입·교체하는 것으로는 핵심기술이 확보되기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현재 운영되는 시스템들은 응용을 제외하면 국내 산업기술 활용이 극히 미약한 상황이고, 산업생태계 미흡으로 인해 고성능 컴퓨팅 관련 핵심 인력의 양성도 어려운 실정이다.

선진국과 기술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이러한 다운 스파이럴(down-spiral) 흐름을 개선하고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핵심 기술 분야에서 기술 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정부는 2030년까지 자체기술로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한 국가 초고성능컴퓨팅 혁신 전략을 세운 바 있다.혁신전략의 실천 계획들이 수립되는 시점에 필자의 연구원이 주관한 슈퍼컴퓨터 기술개발 선도사업의 결과물로서 고정밀 병렬처리 연산 가속기 시제품이 국내 중소기업들과 협업을 통해 개발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프로그래밍 모델을 비롯한 시스템 소프트웨어 및 가속기용 고성능 노드 하드웨어 등과 동시설계(co-design)를 통한 첫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경제논리를 넘어 발사체 기술을 확보한 최근의 사례나, 초기의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지속적 투자를 통하여 세계 시장을 선도하게 된 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생각할 때 이번 고정밀 연산 가속기 개발은 슈퍼컴퓨터 핵심 기술 확보를 통해 기술자립의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벽은 우리를 가로막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전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다가온다. 이미 민간 투자가 활발한 AI기술과 접목되어 신약 및 우주개발, 원자력 분야 기술 선도뿐 아니라 메타버스 등 많은 첨단 분야에서 우리 기술이 세계 곳곳에서 사용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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