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이지나
구병모 소설 '파과', 뮤지컬로 재탄생
심리묘사 내레이션 넣어 작품성 제고
"대중에 친절함·작가주의 고뇌했죠"
주인공 '킬러 조각'役에 차지연·구원영

"창작은 제 자존심이에요. 작품은 나의 거울이잖아요. '누가 봐도 지나리 작품'이라는 평은 저에 대한 찬사예요."

뮤지컬, 연극, 무용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천후 크리에이터인 이지나(60·사진) 연출가에게는 '최초' '파격' '센세이션' 등의 수식어가 뒤따른다. 국내 공연계에서 획일화된 형식에 반기를 들며 다양한 시도를 해온 그가 이번엔 구병모 장편소설 '파과'를 무대화해 지난달부터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선보이고 있다. 작품은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이 일련의 사건들로 변화를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연출은 움직임, 음악, 조명, 의상 등이 하나의 이미지로 극대화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온 미장센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파과'에도 이 연출만의 화법과 분위기가 그대로 녹아있다. 그는 "제 작품이 생략과 축소, 상징이 많아 보통의 뮤지컬보다 불친절하다"며 "이번 작품은 '서편제'나 '곤 투모로우'보다 대중적"이라고 말했다. 원작이 워낙 유명한 이유도 있지만 조금은 친절해지려고 노력했다.

"저는 마이너리티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를 행복하게 할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잘 알아요. 이번에도 제 작품을 좋아해주는 이들과 똘똘 뭉쳐 작업을 했어요. 대중을 위한 친절함을 고려하면서 제 작가주의는 고수했죠. 패션으로 치면 제 작품은 개성 강한 디자이너 브랜드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연출은 "연출가로서 우리나라 배우가 우리의 정서를 무대에서 표현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드는 것이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파과'에서는 동시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현재 한국인의 감수성을 다루고자 했다. 그는 "뮤지컬 장르로 각색할 땐 뮤지컬의 문법으로 이런 옷도 저런 옷도 입혀보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여지를 주는 게 원작 콘텐츠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뮤지컬 '파과'는 강력한 액션과 내레이션을 활용해 독특한 무대를 완성했다. 무대 위 누아르 액션을 구현해낸 데 대해 이 연출은 "무대 배우들은 편집 없이 연기를 하는데, 그들이 이렇게 멋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배우들도 힘들지만 해보지 못한 걸 해내면서 신나게 즐긴다"고 했다.

장면 중간중간 담담하게 깔리는 내레이션은 호불호가 갈린다. 이 연출은 "'파과'는 서사 위주의 작품이 아니라 심리 묘사가 중심이 된다"며 "대사나 노래로 풀면 촌스러워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레이션을 계획하고 완성해나갔다"고 설명했다.

섬세한 내면의 감정 표현뿐 아니라 고난도 액션을 소화해야 하는 조각은 차지연과 구원영이 연기한다. 어린 시절 조각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뒤 죽음에 매료돼 방역업의 길로 들어서는 투우 역으로는 신성록과 김재욱, 노윤이 출연한다.

이 연출은 "차지연 배우가 없으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라며 "차지연은 창작 욕구를 자극시키는 배우"라고 칭찬했다. 이어 "'저 배우만 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시작했다"며 "조각 역을 소화할 만한 배우가 없어서 캐스팅이 힘들었는데, 구원영도 너무 잘해주고 있어서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또 "여배우가 거적때기 입고 화장 하나도 안한 채 노파 연기를 하는 건 베테랑 배우도 어렵다"며 "라이브로 그 힘든 액션을 매번 소화해내는 것도 그렇고, 그야말로 여성파워"라고 짚었다.

투우 역 배우들의 캐스팅 관련 얘기도 풀어놨다. "저는 '파과'를 사실주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판타지죠. '파과'라는 거대한 매트릭스 같은 공간을 만든 거예요. 캐릭터들도 다 특수한 공간에 있는 인물들로 접근했어요. 예를 들어 투우에 대한 해석도 다 다르겠지만, 험악하게 생긴 킬러는 판타지를 죽이잖아요. 판타지적인 해석, 판타지적인 외모도 필요하죠."대극장 무대의 개성 있고 센 역할을 주로 해온 신성록은 이 연출의 작품에 처음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이 연출은 "신성록이 출연 결정을 하기까지 엄청 망설였다"며 "그동안 했던 작품들과 분위기가 달라 처음엔 괴로워했다"고 귀띔했다. 이 연출이 선호하는 톤과 신성록의 연기 톤이 달라 많은 대화 끝에 절충을 했다.

"신성록이 가장 화려하고 표현력이 센 투우인데, 그의 연기를 계속 봐온 관객들은 내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서로 많이 맞춰줘서 그 정도가 된 거라 우리끼리 웃기도 했어요. 이번에 작업해보니 신성록은 평소 생각을 많이 하고 아이디어도 넘치는 배우더군요. 프로듀서를 해도 잘할 것 같아요."

이 연출은 '파과'의 메시지처럼 상실을 살아낼 결심을 한 경험을 묻자 "상실은 끊임없이 쌓이고 상실을 겪으면서 살아야 된다"며 "제가 이제 파과가 돼가니까 기이함·기묘함이 느껴진다"고 답했다. 그는 "늙음이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고 기이하다"며 "기억력이 감퇴돼도 내 작품에 대한 촉은 더 선명해져 스타일이 확고해진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에이전시 제로' '싱싱한 과일' '해니가 사라졌다' 등 밝은 넘버가 신나는 노래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 연출은 "다 늙음에 대한 기이함을 표현한 넘버들"이라며 "음악적으로 그렇게 장치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생애 가장 반짝였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이 연출은 "앞으로 10년간 '서편제' '곤 투모로우' '파과' '도리안 그레이' 그리고 새 작품 하나 더 만들어 5개의 창작뮤지컬이 계속 무대에 오르면 그때가 될 듯"이라고 했다.

"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위해 지금 이 모든 고충·고난·비난을 달콤하게 여기고 그날만을 기다리면서 버텨요. 육체는 저물어도 내 작품이 안 늙으면 얼마나 영광이겠어요. 창작자의 희망이자 꿈이죠."

이 연출은 내년에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를 올릴 예정이다. 2016년 초연 당시 제작을 맡은 씨제스컬처가 공연사업을 접으면서 페이지원(PAGE1)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가져오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음악만 남겨두고 완전히 새로 만들어 800석 정도의 극장에서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2026년엔 '곤 투모로우' 10주년 공연을, 2027년엔 '파과' 재연을 계획하고 있다. 이 연출은 "'서편제'도 다시 하겠지만 먼저 '파과'가 안착돼야 한다"며 "이후 작가주의 작품 하나를 더 무대화하려면 지금부터 개발을 시작해야 하는데 풀지 못한 숙제"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파과'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공연은 자기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확인하는 문화의 경험이에요. 사람의 개성을 남의 판단에 맡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이니까 호불호 강한 이지나 작품도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불쾌함도 하나의 감각이거든요. 새로운 도전이 될 테니 확인하세요. 전 자신 있습니다."

박은희 문화전문기자 ehpark@dt.co.kr

창작뮤지컬 '파과' 포스터. 페이지원 제공
창작뮤지컬 '파과' 포스터. 페이지원 제공
창작뮤지컬 '파과' 공연 장면. 페이지원 제공
창작뮤지컬 '파과' 공연 장면. 페이지원 제공
창작뮤지컬 '파과' 공연 장면. 페이지원 제공
창작뮤지컬 '파과' 공연 장면. 페이지원 제공
이지나 연출가. 페이지원 제공
이지나 연출가. 페이지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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