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1920년 8월 동아일보 '조선물산운동 창립총회' 보도

'내 살림 내 것으로' '우리 것으로만 살기' 표어 눈길

소금·설탕·과실 등 제외하고 모두 조선 것 쓰기 운동

조선물산운동 깃발에는 8도 특산품… 선전지도 배포


지난해 한국이 세계에서 1인당 명품 소비를 가장 많이 한 나라가 됐다. 1인당 평균 40만원으로 미국, 중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명품을 소비했다. 구매력이 늘어난데다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려는 욕구도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00년 전에는 정반대였다. 국산품을 애용해서 나라를 살리자는 운동이 있었다. 바로 '조선물산장려운동'이다. 그 모습을 찾아 100년 전으로 떠나본다.

조선물산장려회에 대한 소식은 1920년 8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처음 나온다. "평양 유지 김래원(金來元) 조만식(曹晩植)씨의 발기 중이던, 조선물산장려회는 오는 23일, 24일경에 창립총회를 개최한다더라." 2년이 지난 1922년 6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평양 유지 제씨(諸氏)의 발기로 조선물산장려조합 창립 총회를 지난 26일 오후 2시 대성관(大成館)에서 개최하여 임시회장 홍재기(洪在祺)씨로부터 조선물산장려에 대한 취지 설명이 있은 후 규칙 통과, 임원 선거를 행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조선물산장려 표어를 현상 모집했다. 당선작을 살펴본다. 김두관(金斗寬, 대구)의 '내 살림은 내 것으로', 서인식(徐寅植, 경성부 관훈동 78)의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 권병길(權炳吉, 함흥군 하서리 47)의 '우리는 우리 것으로 살자', 배숙경(裴淑卿, 경성 동아부인상회)의 '우리 것으로만 살기'다.

마침내 1923년 1월 20일 조선물산장려회 발기 총회가 열렸다. "발기 총회는 그제 20일 오후 7시부터 시내 경운동 협성학교(協成學校)에서 개최되어 총회를 마치고 순서를 창립 총회로 옮겨 의사를 진행하였으나 (중략) 회비에 대하여는 50전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전 조선 사람은 누구든지 회원이 되게 하기 위하여 회비는 전부 없이 하자는 의견도 있어서 아직 확실히 작정하지 못하였다더라." (1923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

창립 총회 후에는 대대적인 강연과 선전을 통해 그 취지를 알리기 시작한다.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오는 음력 정월 1일부터 조선 물산을 쓰기로 하고 의복에는 남자는 주의(周衣;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裙)를 우선 지어 입고, 음식에는 소금, 설탕, 과실을 제한 외에 전부 조선 것으로 먹고, 일용품은 조선산으로 대용(代用)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지마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선 산품을 사용하자는 취지를 선전하기 위하여 강연회를 개최한다." (1923년 2월 3일자 동아일보)

강연회 일시와 장소, 연사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2월 3일(토요일) 오후 7시, 장소는 경운동 88번지 천도교회당. 연사는 이종린(李鍾麟), 최순탁(崔淳鐸), 이갑성(李甲成), 이돈화(李敦化), 오화영(吳華英).

1923년 음력 정월 새해가 밝았다. 드디어 조선물산장려회가 정월 초하루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태세를 갖췄다. 1923월 2월 16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오늘은 음력으로 계해년 정월 원조가 되었도다 (중략) 금전은 외국으로 빠지고 우리 조선 사람은 자고송(自枯松; 저절로 말라 죽은 소나무)이 되고 말 터이라. 그래서 물산장려회가 설립되어 오늘부터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각 방면으로 선전한다 하니, 이것이 구력 신년 벽두(劈頭)에 제일 희소식이요 서로 치하 인사할 일이다."



그러나 2월 16일 열릴 예정이었던 토산 장려 선전대 행렬은 경찰 당국의 금지 명령으로 중지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모모(某某) 단체의 사상이 근래에 자못 악화(惡化)되어 이번 행렬을 기회로 불온한 사태를 일으킬 염려가 있음이라"하였다.

이런 중에도 눈에 띄는 것은 조선물산장려회의 깃발이다. "조선 8도의 특산으로 바탕을 하였다. 단순한 가운데에 깊은 의미가 있으며 질소(質素)한 모양이 특별한 취미가 있는 바, 자세히 소개하면 경기도 강화(江華) 반포(斑布), 경상도 안동 갈포(葛布), 전라도 전주 생초(生초), 충청도 한산 세저(細苧; 세모시), 강원도 철원 명주(明紬), 황해도 해주 백목(白木), 함경도 육진(六鎭) 환포(環布), 평안도 안주 항라(亢羅)로 만든 것이라더라." (1923년 2월 16일자 동아일보)

또한 수 만 장의 선전지를 만들어 배포했다. 그 선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입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쓰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조선물산장려회 헌칙도 제정했다. 헌칙 제3조에는 설립 목적이 나와있다. '본 회는 조선 물산을 장려하며 조선인의 산업을 진흥하여 조선인 경제상 자립을 도(圖)함을 목적함'이라고 밝혔다. 일본 물건으로부터 국산품을 지키기 위해 토산품을 애용하고, 이를 통해 민족 기업 및 상업 자본을 육성하자는 취지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물산장려 운동은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진주(晉州)에서는 이번 음력 정월 초하룻날부터 세배꾼들의 옷은 모두 조선 토산으로만 지어 입었는데 그중에도 호사(豪奢)하기를 자기 생명 이상으로 아는 기생들까지도 누구누구를 물론하고 모두 조선산으로 옷을 지어 입어서 (중략)" (1923년 2월 16일자 동아일보) △"경의선 사리원 덕성(德盛)학교에서는 여학생 80여명이 댕기부터 조선 물산으로 쓰자며 음력 정월 초하룻날부터 전부가 평양산인 자주로 댕기를 만들어 시행키로 한바 (중략)" (1923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충청북도 보은군에서는 장(場)마다 돌아다니는 장꾼이라도 토산물이 아니면 허가하지 아니 하기로 하였다더라." (1923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

'다반향초'(茶半香初)라는 말이 있다. '차를 반쯤 마셨어도 향은 처음과 같다'라는 뜻이다. 차가 끝까지 같은 향을 유지하듯이 우리 스스로의 삶도 한결 같은지를 뒤돌아 보아야 한다. 늘 한결같은 원칙과 태도를 중시해야 하는 것이다. 100년 전 조선물산장려운동의 향기가 다시 살아나야할 때가 요즘이 아닌가 싶다.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