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업이 미중 기술경쟁과 국익 우선주의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인가? 그리고 국제적으로 뚜렷해지고 있는 정부-기업의 새로운 전략적 협력 노력을 감안할 때, 한국의 정부-기업 협력관계는 어떻게 재설계 되어야 할 것인가? 현재 한국에는 경제안보의 국제적 파고 앞에 다양한 진단과 전략적 선택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진행 중이다.
첫째, 한국은 미국의 경제안보 전략과 기술동맹 전략에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둘째,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탈중국'은 가능하거나 바람직한 것인가? 셋째, 한국에게 바람직한 경제의 안보화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넷째, 배터리와 반도체 등 주요 핵심 기술에 관한 기업의 전략과 무역과 거시경제 등을 포괄한 국가의 전략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다섯째, 한국 정부와 기업의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외교 역량은 어느 정도이고 향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여섯째, 현재 정부의 기술개발 및 기업지원 전략은 어느 정도 효과적인가? 일곱째, 공급망에서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한국기업의 기술혁신의 전략은 무엇인가? 각 시각과 주체별로 다양한 논쟁과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8월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Made in America' 정책으로 인해 한국 대표기업인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는 생산 및 투자 결정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업 방향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한국 주력산업인 반도체,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이 위협받으며 국가적 위기감마저 자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배터리, 핵심광물 등 미래 산업 역시 미국 중심 공급망 및 산업생태계 재구축 대상으로 전망되면서 각국 정부도 대응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즉각적 대응을 요구받고 있으며 나아가 미래 첨단산업 경쟁에서 선도적 위치를 지속하게 하는 정부의 역할과 근본적 지원방법에 대한 논쟁이 커지고 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와 과학법(Semiconductors(CHIPS) and Science Act)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에 지난 8월 9일과 16일 잇달아 서명했다. 중간선거를 위한 적극적 입법이라는 평가도 존재하지만 미국의 산업주도권 확보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여야의 초당적 합의에 기반한다.
각 법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과학 분야의 투자를 강화하고, 인플레이션과 기후 위기에 대응하며 일자리 창출 등의 중산층 지원을 목표한다. 하지만 첨단산업의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의 기술우위를 바탕으로 한 대대적 산업재편에서 주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G2 국가간 정치외교적 갈등이 경제정책으로 표출된 미중 무역전쟁과는 달리, 이번 미국발 첨단산업 주도권 경쟁은 동맹국인 유럽, 일본, 한국 기업에의 부정적 영향까지 감수한데서 큰 차이가 존재한다.
전략기술과 산업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관련 법률들을 마련하며 제도 개선과 재정 및 세제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가장 입법이 활발한 분야는 반도체이다. 미국 돈 그레이브스 상무부 부장관은 반도체 없이는 세계 어디서도 상품을 생산할 수 없고 기업을 운영할 수 없음을 강조했고, 펫 갤싱어 인텔 CEO는 석유 매장량이 아닌 반도체 제조가 지정학을 결정한다고 설명하였다.
글로벌 분업구조의 이점을 활용해온 반도체 산업은 중국의 위협과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불안이 가중되면서 자국 내 생산과 기술우위를 위한 연구개발 강화로 기조가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미국 Chips법은 반도체에 총 520억 달러를 지출하는데, 시설에 390억 달러, 연구 및 인력 양성에 110억 달러, 국방 관련 20억 달러를 지원한다. 또한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설립할 경우, 투자액의 25%를 세액공제하며 신규 시설 투자기업에 대한 보조금은 최대 30억 달러에 이른다.
유럽연합(EU)은 2030년까지 세계 시장점유율을 현 10%에서 20%로 증가시키고자 역내 공급망 구축을 지원하는 EU 반도체법 입법을 준비하며, 430억 유로 투자도 계획 중이다.
이에 앞서 일본은 지난해 1조4000억엔의 민관 투자기금 조성을 발표한데 이어, 대만 TSMC의 R&D센터를 쓰쿠바에, TSMC와 소니가 합작한 팹을 구마모토에 유치하며, 각각 사업비의 절반에 이르는 190억 엔, 4760억 엔을 정부가 투자하였다. 올해 제정된 경제안전보장추진법([經濟安全保障法)은 2023년부터 시행이 예정되어 있다.
중국 역시 일찍부터 반도체를 7대 전략 육성분야로 포함시켜 390억 달러의 투자기금을 활용 중이다.
이와 함께 반도체 산업의 주요 성장전략으로 평가받아 온 인수·합병 역시 경제안보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2018년 미국 퀄컴의 네덜란드 NXP 반도체 인수, 2021년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의 고쿠사이일렉트로닉스 인수를 중국 당국이 불허하였다. 반대로 한국의 매그나칩 반도체를 중국 사모펀드인 와이즈로드가 2021년 인수하고자 하였으나 미국 재무부 외국인투자위원회가 제동을 걸었고 결국 무산되었다.
올해 초 미국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설계 기업 암(ARM) 인수 소식에, 중국 관영언론은 중국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통제 아래 처할 수 있어 중국 당국이 인수를 불허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영국 내에서도 자국 첨단기업의 미국 인수에 대한 위기의식이 커진 것은 물론이다. 미국 정부가 경쟁제한을 이유로 불허하였지만 중국, 영국, 독일의 경쟁 당국 역시 불허하였다.
한국은 지난 2월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첨단전략산업법)을 제정하고 8월부터 시행 중이다. 국가·경제 안보와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2042년까지 한시법으로 운영되며, 혁신생태계와 기술 역량 강화를 통해 산업의 지속가능한 기반 구축을 목표로 도입되었다. 5년마다 전략산업 등의 육성·보호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이 기본계획에 따라 매년 실행계획을 수립 및 시행하게 된다.
전략기술을 선정하는 기준은 산업 공급망, 국가·경제안보에 미치는 영향, 성장잠재력과 기술 난이도, 다른 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 산업적 중요성, 수출·고용 등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다. 지난 11월 초에 열린 첫 회의에서 반도체·이차전지·디스플레이 3대 산업과 관련 15개 첨단전략기술 분야가 전략기술로 선정되었다. 이에 따른 전략산업에 대해서는 투자, R&D, 인력, 법제 특례 등을 제공한다.
올 1분기에 선정하기로 한 첨단전략기술이 11월 초가 되어서 지정된 데다 그 내용조차 다른 국가의 지원정책에 미치지 못해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많다. 먼저 시설투자에 대한 세제 지원이 미국의 25%에 비해 중소기업조차 16~20%이고 대기업은 6~10% 수준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는 신생 Rapidus를 첨단반도체 제조 분야 연구개발 사업자로 선정하고 700억 엔을 투자하며 추가지원도 예고하였다. 토요타, 소니, 소프트뱅크, 키오시아, NTT, NEC, 덴소, 미쓰비시, UFJ 은행의 8개 대기업이 각각 10억 엔(UFJ은행 3억 엔)을 출자한 기업으로 2027년에는 삼성전자만큼 기술력을 끌어올려 2나노 이상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행법은 경쟁력 강화 지원책으로 보기 어려우며 다른 국가에서 투자를 극대화하기 위해 선도 대기업을 배제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과도 대비된다. 산업단지 구축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도 한계가 있다.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용수 시설이 지나는 여주시와의 인허가 협의로 1년 반 이상을 소요했다. 12월 초 극적으로 타협안이 마련되었지만 이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으므로 특별법에 첨단전략 기술 산업단지를 조성, 운영에 있어 정부의 지원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학과 정원 확대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위의 문제점을 반영한 K-칩스법이 지난 8월 여당 주도로 발의되었으나 4개월째 표류 중이다. 지역균형발전에 위배된다는 야당의 주장에 따라 수도권 대학 정원 조정은 이미 무산되었다. 산업단지 지원에 대한 강행 규정도 재정운용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기재부가 난색을 표한데다, 세액공제 비율 상향도 대기업 특혜 논란에 휩싸이며 K-칩스법은 국회 통과도 어려운 상태이고, 통과되더라도 반쪽 법에 지날 것이라는 우려를 받고 있다.
정치권은 지지부진하지만 기업 환경의 변화는 현실화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8월 미국 텍사스주에 신규 11개 공장 투자를 검토하고, SK그룹은 총 500억 달러 투자를 발표하며 반도체 생산기지의 한미 이원화가 본격화되고 있다. 중국을 배제한 신 반도체 공급망은 기존 생산기지 축소를 뜻하는 한편, 세계 반도체 장비 기업이 중국 대신 한국으로 투자를 선회함으로써 반사이익을 기대하게 한다. 반도체 장비 기업인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MAT), 램리서치, 일본 도쿄일렉트론, 네덜란드 ASML이 한국에 진출 또는 거점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국자동차연구원은 내년도 자동차 수출이 4.2%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였는데 그 이유를 인플레이션 감축법에서 찾았다. 당장 미국 내 현대·기아차의 전기차 월 판매량이 급감하기 시작해 11월 1,834 대를 기록했으며 이는 최고 실적을 기록한 3월 6,718 대의 27% 수준이다. 공급물량 축소로 감소세에 있었으나, 자국 내 생산 전기차에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IRA가 이를 가속화시킨다는 해석이다.
이처럼 산업별, 정확히는 산업 내 품목별로 명암이 엇갈리고 있는데다 주요국의 관련 정책은 현재진행형이므로 영향을 가늠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미국이 목표하는 글로벌 공급망 지형 변화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21년 2월 행정명령을 통해 '회복력 있고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4대 핵심품목인 반도체 제조 및 첨단 패키징, 대용량 배터리, 핵심광물(희토류) 및 소재, 의약품 및 원료의약품의 공급망 검토를 지시하였다. 덧붙여 핵심산업인 방위, ICT, 에너지, 운송, 농업의 핵심산업의 공급망 리스크를 살피고 대응책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11월 말 바이든 대통령은 SK실트론 CSS 공장을 찾았다. 임기를 시작한 후 한국기업 첫 방문으로 전기차 반도체 핵심소재인 실리콘카바이드 웨이퍼를 생산하는 공장을 택했고, 중국에 공급망 인질을 잡히지 않겠다고 밝히는 등 미국 제조 우선에 대한 의지를 다시 천명했다. 앞으로도 핵심 산업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규모 투자와 공급망 재구축 정책이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경제안보의 격랑 속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첨단기술 경쟁에서 선도적 위치를 유지하는 일이다. 미국이 제시한 4대 핵심 품목 중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의 공급망에서 한국이 전략적으로 불가결한 입지를 가지게 된 것은 기업의 적극적 연구개발과 경쟁력 강화 덕분이다.
하지만 과거 노력으로 이룩한 성과가 오히려 대기업에 대한 특혜 논란을 불러 타 국가에 비해 지원 규모와 내용이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K-칩스법 논의 지연의 이유를 여야의 정쟁 대립으로 볼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첨단산업을 둘러싼 경제안보 이면에 있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합의가 부재한 데 있다.
국가 간 기술우위 경쟁은 산업정책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최근 일본 정부는 이러한 변화를 적시하였다. 고속성장 시기 특정 산업 보호와 육성 정책을 활용하였고 이후에는 민간의 역할을 강조하며 시장을 정비하는 데 집중해 왔다. 그 결과, 성장과 투자 부족, 30년간의 침체를 겪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과제에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투자하며 정부가 민간기업을 대규모·장기·계획적으로 확실히 지원하는 '사명(미션) 지향적' 산업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장 분야에 인적·자본 투자를 대담하게 진행함으로써 디지털·그린 경제의 사회적 과제 해결을 기대한다.
이러한 협력 모델은 마리아나 마추카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교수의 '기업가형 국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가 소극적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비전 수립과 집중 투자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 역할을 창조하는 '기업가형 국가'논의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경제안보로 촉발된 첨단기술 산업생태계의 변화를 단순히 민간기업의 영역으로 취급하기보다는 국가의 장기적 도전과제를 발견하고 산업정책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향을 세우는 기회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국가 경제를 지지하는 핵심전략산업에 대한 민관협력과 대규모 인적, 물적 투자 지원이 신속하게 결정될 수 있다.
대내 혁신 협력모델의 수립과 동시에 대외 난제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한다. 생산뿐만 아니라 소재, 부품의 원산지도 규제 대상이 되므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더욱이 한국은 지정학적 리스크와 경제산업 구조적 특성으로 그 셈법이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다. 대북 문제가 상존하는 한국경제에서는 미국과의 안보동맹이 절대적인 상황이다. 역내 공급망 구축이 가능한 EU, 경제안보 결정을 미국과 일치시킬 수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중국경제와 상호 의존도가 높다 .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 대해 지난 10년간 한국의 무역 의존도는 20~25%를 지속했고 자본재와 중간재 중심 교역구조로 디커플링이 어렵다. 미래 제조산업의 핵심인 희토류의 대중 의존도는 2020년 기준 35%로 여전히 높으며 전기차 핵심소재인 네오디뮴 영구자석은 전체 수입액의 88%에 이른다. 그러므로 2018년 한일 무역분쟁 당시와 같이 탈중국을 곧바로 선언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강화하는 동시에 한국의 경제적 실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정책 운용의 묘가 필요한 시점이다. 무엇보다 외교역량 강화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번 IRA의 보조금 문제가 시험대가 될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를 대표하는 법이나 미세 조정은 가능하므로 미국 내 공장 설립 기간 중 보조금 제외를 유예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관련 국가인 EU, 일본 등과의 다자 대응 체제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외교전략의 방향을 설정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산업구조에 대한 이해와 경제적 분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품목과 산업별로 가치사슬을 검토하고 지속가능한 개선 대안을 마련하여야 한다. 한국 역시 한국의 국익과 경제안보를 우선으로 상대국과 협상한다는 인식을 미국,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갖도록 사전적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경제안보 재구축 과정에서 한국기업이 쟁점이 된다는 사실은 역으로 한국기업의 기술 우위와 중요성을 반증한다. 반도체와 전기차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일본기업이 배제되는 현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혁신과 기술우위로 기업이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만 국가산업과 경제안보의 미래도 있다. 본 기고의 원문 출처는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188호' 임을 밝히며, 원문의 저작권은 동아시아재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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