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장이 여전히 불안하다. 50조원 대책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언제 위기상황으로 번질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최근 일련의 사태로 금융시장 안정의 핵심인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최고의 신용 등급을 부여받던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했다. 채무불이행 선언을 한 당사자를 넘어 공공부문 전반에 대한 신뢰 저하로 번졌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발행하는 공채는 믿고 투자하는 대상이었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투자자가 줄면서 채권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한다. 우량한 AA- 회사채 금리가 연초대비 두 배 이상 (2.4%→5.7%) 급등했고, 발행물량도 9월 이후 계속 내리막을 타고 있다.
민간도 합세했다. 해외투자자를 대상으로 발행한 외화표시 증권을 중도 상환한다고 했다가 번복한 것이다. 중도상환 여부는 금융회사가 선택할 수 있지만, 약속하고 나서 말을 바꾸어 한국물 전반을 의심하는 사태로 번졌다. 중남미 지역의 금융회사들이 처음부터 중도상환이 어렵다는 의사를 투자자들과 공유하면서 문제 없이 지나간 사례와 대비된다. 지금처럼 불안한 시기에 채권 발행회사 또는 지급보증기관을 믿을 수 없게 되면 급속한 위기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 금리 인상이 예상되어 만기까지 보유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채권을 투매하기 때문이다. 금리가 폭등하고, 투자자들이 사라져 발행시장이 얼어붙게 된다.
한국전력이 원가에 못 미치는 전기요금으로 적자가 커지면서 대규모 물량을 쏟아내는 것도 시장의 불안을 확대·재생산시키고 있다.
한전채 발행 규모는 금년 중 23조4000억원에 달하고, 2000억원 이상 추가될 전망이다. 전기요금 인상 대신 발행 한도를 확대한다면 투자자가 줄어든 시장에서 최우량 등급의 한전채가 유동성을 공룡처럼 빨아들일 것이다. 은행이나 한전과 같은 공기업보다 신용도가 취약한 캐피탈, 저축은행, 자산운용사 등 비은행 금융회사가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겪는 이유이다.
지금은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할 때다. 공격적인 통화 긴축 시기에 신뢰를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한 비상시국이기 때문이다. 비은행 금융회사의 부실로 인한 금융경색이 실물경제 마비를 초래할 가능성을 정부가 개입하여 차단해야 한다. 월가의 이코노미스트 모하메드 엘-애리안은 최근 금융 리스크의 비은행 부문 집중문제를 지적하면서 정책 당국의 총력 대응을 강조했다. IMF가 금융시장의 유동성 리스크를 완화시키는 것이 정책 당국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보다 지자체나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야 한다. 스스로 적극 나서서 투자자에게 재무상황이나 지급 능력이 충분함을 설명하는 IR 등을 개최해야 한다. 민간회사도 은행연합회와 금융투자협회 등 주요 금융협회가 자율규제 차원에서 적극 나서야 한다. 회원사들이 투자자의 신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약속 등은 신중히 하고, 소통 노력도 병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력이 채권시장에 끼치는 구조적 위험성을 해소하려면 전기요금을 서둘러 인상해야 한다. 물가가 비상이라는 이유로 한전을 회사채 발행에 매달리게 한다면, 회사채 시장과 한전의 공멸을 피하기 어렵다. 전기요금은 원가보상을 할 수 있도록 조속히 현실화하고, 취약계층의 부담 증가는 재정지원을 늘려 대응해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홍콩이 모든 가계에 대해 전기요금을 지원한 것을 벤치마킹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채권안정펀드의 공정한 운용을 통해 정부의 도덕적 해이 방지와 시장안정 의지를 전달해야 한다. 정부의 50조원 대책 중 지급보증 규모로 발표한 것은 시장이 예상하는 규모에 크게 못 미친다. 공신력 있는 위원회 등을 구성해 투명하게 대상 채권을 결정함으로써 시장의 공감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채권시장이 어렵지만, 2008년 금융위기와는 분명히 다르다. 채권 매입 여력을 가진 국내외 투자자들이 건재하기 때문에 시장의 신뢰만 회복된다면 빠르게 정상화될 수 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 발표로 시장이 빠르게 호전되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금융당국이 신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