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이 죽었다고 한 니체나 신은 환상이라고 한 도킨스나 신을 모독하진 않았다. 독립적 존재로서 인간의 존귀함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극렬 좌파 무신론자 히친스마저 신을 무시하기보다 인간자체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 모두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근원적이고 선험적인 어떤 판단력, 이성과 양심에 주목했다.
그런데 신을 모시는 신부 2명이 신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일이 일어났다. 한 성공회 신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탄 전용기(여기엔 윤 대통령 내외뿐 아니라 그의 보좌진, 기자, 승무원 등 많은 인원이 탑승해 있다)가 추락하길 함께 염원하자고 했다. 가톨릭 신부는 윤 대통령 내외가 전용기에서 추락하는 그림을 올리고 "비나이다. 비나이다"라고 썼다. 그들이 속한 종교의 교리에 정면 배치된다. 어느 종교든 인간을 저주하라고 가르치진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교단에 해를 끼치고 신자들 얼굴에 먹칠을 했다.
범(汎)기독교의 본산인 유럽에서 인격신의 퇴조가 일어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신앙심이 버티고 있는 소수 국가 중 하나다.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훗날 판가름 날 것이다. 기독교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바는 다대하다. 완전하진 않지만 한국인을 근대인으로 변모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개인'을 발견하게 했으며 자기 존재와 가치에 눈뜨게 했다. 현대 한국 사회정신의 밑바탕에 한 주류로 형성된 기독교적 제의와 관습은 19세기 말 이후 서북 기독교인들의 노력의 결실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들의 헌신이 범 기독신앙의 이미지를 향상시켰다. 국가와 사회에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소수 가톨릭 사제와 일부 개신교 분파에서 종교의 선을 넘어 정치적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권위주의정권 시대 민주화운동에 직접 가담하고 성원하고 민주화세력의 진지가 됐다. 그 공훈에 대해서는 평가가 좌·우파를 막론하고 별로 갈리지 않는다. 하나, 시대가 바뀌고 자유와 민주제가 회복되었는데도, 이들은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사회 본류에 비하면 작은 문제들을 침소봉대하고 계급적 입장에서 이제 회복된 자유와 시장을 헐뜯기에 바쁘다.
신앙심의 유무를 떠나 종교와 종교인은 여전히 사회도덕과 윤리의 길잡이로서 존중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향도가 길을 잃고 헤매거나 잘못된 길로 접어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나. 우리 사회가 누가 봐도 자명한 사실과 진실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상대적 입장을 취하는 극단적 혼란을 겪고 있는 것도, 어쩌면 기준이 돼야 할 종교가 스스로 자격을 반납하고 편파성으로 내달은 결과일 수 있다.
혹자는 서구에서 부는 탈기독교, 나아가 탈종교의 바람에 대해 16세기 종교개혁에 이은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기성 종교가 도그마를 고집하거나 독선을 부릴 때 미래는 없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과거에 통했던 명분을 부여잡고 정치인 뺨치는 정치적 행동을 해선 반감만 살 뿐이다. 더욱이 두 신부의 막말은 평균적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에서도 크게 벗어났다. 하물며 신부임에랴.
종교와 종교인은 한 사회의 가장 마지막 귀의처다. 장례에서 종교적 의식을 갖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종교는 인간과 사회의 타락을 막는 보루다. 비종교인이라도 그것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게 종교와 신앙의 기능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두 명의 신부는 그 선을 넘었다. 신을 매도한 사제가 과연 신자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박애를 말할 수 있을까. 더 가관은 그 둘 모두 반성은커녕 사회의 질타에 이죽거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세속인 뺨친다. 그들은 도덕과 양심이 화석화되어가는 우리사회를 더 막장으로 만드는데 기름을 부었다. 성공회 교구는 신부의 사제직을 신속히 박탈했고 가톨릭 교구는 정직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이게 끝일까. 신을 스스로 모독할 때 종교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