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지만 알지 못한 참사…시민들은 배우며 변화하는 모습 정작 국회는 '책임공방' 내려 놓고 일할 수 있나 지난 주말 이태원 참사에도 정치권은 말로만 '초당적 협력'을 언급했을 뿐, 사실상 일주일 내내 책임소재로 싸웠다.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책임론을 언급하면서 '세월호 사건이 떠오른다'며 정권을 정조준했고, 민주당 지지층은 단일대오로 결집했다.
한국의 정치권에서는 대형 재난이 터질 때마다 "예견된 참사인데 정부가 막지 못했다"는 문장이 나오고, 여야는 이를 두고 싸운다. 사전에 알 수 있는데, 혹은 알았는데 막지 못했다는 식이다. 2004년 김선일 피랍 사건 때도 이 문구가 등장했고 공무원들이 곤욕을 치렀다고 하니, 20년도 더 된 명제를 들고 진영과 무관한 싸움을 벌이는 셈이다.
그런데 '안다'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단계가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설명해줬다면, 이를 단순히 들었다는 측면만 가지고도 우리는 안다는 개념을 쓰지만, 완벽하게 이해하고 향후 일어날 일을 예상하는 수준의 차원도 우리는 '안다'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큐브 맞추는 법'이라면 유투브에서 해당 영상을 학습해서 따라 할 수 있는 사람도 '안다'고 표현하지만, 10초도 안 돼 큐브를 맞추는 선수들도 '큐브를 맞출 줄 안다'는 표현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도 참사가 일어날 줄 '알았다'거나 '알 수 있었다'에는 엄청나게 넓은 스펙트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압사를 당할 것 같다고 신고했던 사람들조차 사건 직전까지 진짜 압사를 당할 줄은 몰랐을 수 있다. 만일 인파로 인한 압사 사태가 아니라 북한의 공습사태여서 곧 미사일이 낙하한다고 가정해보면, 미사일에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 사람 말고는 모두 자리를 이탈해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밀고 밀렸으니 사건 발생 장소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은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1년에 한 번뿐인 주말에 기분을 내러 나온 시민들이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될 줄 알고도 거기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알았다'거나 '알 수 있었다'는 표현이 쉽게 쓰인다. 세월호 사태 때 해경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표현처럼, 이번에도 경찰은 알고 있었다는 표현을 쉽게 쓴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서 당일 경찰인력의 상당수는 서울 도심에서 이뤄지는 집회에서 질서를 유지를 하는데 투입됐다. 과연 경찰은 어느 곳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물론 이번 사태의 경우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책임 있는 사람이 '결단'하는 과정까지 매끄럽게 진행됐다면 좋았겠지만, 그동안 이태원이 인파로 인한 수도 없는 정체현상을 빚었음에도 대형 압사사고가 났던 적은 없다는 데이터는 오히려 '인명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을 확률이 높다'는 식의 왜곡된 정보로 다가왔을 수 있다. 이래서는 '제대로 알 수' 없다.
시민들은 이제 진짜 압사사고의 위험성을 점점 알아가고 있다. 최근 시민들은 SNS에 이태원 사고 이후 지하철에서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는 글을 여럿 올리고 공유하고 있다. 복잡한 서울 도심의 지하철역은 이태원 참사에도 불구하고 매일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밀고 밀리는 현상이 반복되는 '지옥철'일 수밖에 없는데, 위험성을 인지한 시민들이 "밀지 마세요"라는 말에 움직임을 멈추는 등 질서를 지키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제도로 시민들의 안전을 담보해야 할 정치가 과연 이번에는 20년 묵은 명제를 들고 싸우는 모습에서 벗어나 진짜 재발방지책에 힘을 모을 수 있을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당장 지옥철 경험을 반복하는 시민들의 위험도를 낮추기 위해 이미 여러 차례 경고됐던 9호선이나 김포 골드라인 열차를 증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과연 정치권은 여야를 넘어 기꺼이 증량에 나설까 아니면 물타기에 나섰다며 또 다른 책임공방에 열을 올릴까.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틀렸기를 바라는 마음이다.임재섭기자 yjs@dt.co.kr
청년정의당·청년진보당·청년녹색당 등 청년 당원들과 청년하다·진보대학생네트워크 등 청년 단체가 모여 결성한 이태원 참사 청년 추모행동 관계자들이 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인근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침묵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