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쏠리며 타 기업 조달자금 길 막아 회사채 시장 양극화 현상 뚜렷 "산업은행이 직접 대출, 자금시장 경색 막아야"
정부가 50조원이 넘는 막대한 자금을 긴급 수혈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채권 시장의 분위기는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 지방자치단체의 초우량 채권마저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채권 시장 전반에 퍼지면서, 높아진 채권 금리에 '신뢰'의 비용을 더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와 동일한 신용등급(AAA)을 보유한 한국전력공사의 채권(한전채)가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과거 '국민주'로 불리던 한전은 이제 '국민채'의 발행처로 더 유명해졌다.
하지만 한전채로 수요가 몰리면서 회사채 시장의 시장 가산금리(스프레드) 부담을 높아진데다 한전채가 다른 기업의 조달 자금을 흡수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전은 지속된 적자로 지난해 말부터는 매달 조 단위의 채권을 쏟아내고 있다.
26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2년 만기 채권을 600억원 어치 발행했다. 발행 금리는 연 5.900%로 전날보다는 소폭 낮아졌다. 전날 일부 유찰을 겪었지만 하루 만에 미발행 물량을 가지고 다시 입찰에 나선 것이다.
채권 금리가 뛰고 유동성이 마르는 요즘 한전채도 인기를 유지할 수 없었다. 연 6%에 육박하는 금리를 내걸고도 3년 이상 장기물은 번번이 발행 목표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전날 한전은 2년 만기 채권 2000억원과 3년 만기 2000억원에 대한 입찰을 진행했다. 2년물은 800억원 어치를 발행해 조달을 확정했지만 3년물은 최종 유찰된 것으로 확인됐다. 발행된 2년 만기 한전채의 금리는 연 5.99%로 6%에 육박했다.
연초만 해도 2%대 중반이던 신규 발행 금리는 이제 3배에 달한다. 한전도 앞으로 갚아야 할 원리금의 급증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그러나 한전은 이달 추가 조달을 위해 투자자 모집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국회는 한전의 채권 발행한도를 늘리는 내용의 법안도 검토하고 있다. 한전의 적자 때문이다.
한전은 지난해 말부터 막대한 물량의 채권을 쏟아내고 있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들어 26일 현재까지 한전은 회사채 23조4900억원어치를 발행했다. 지난해 상반기 1조원 초반에 그쳤던 한전채 발행량은 하반기 9조원을 상회했다. 올해는 이미 작년 전체 발행액의 2.5배를 넘겼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신용도가 높고 정부가 원리금을 지급 보증하는 특수채들이 대거 발행돼 회사채 시장이 양극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반 회사채는 높은 발행금리를 걸어도 미매각이나 발행 유찰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자 회사채 발행 규모도 축소세다. 올 상반기까지는 매달 7조~8조원대를 유지했지만 지난 7월 6조원대로 8·9월에는 5조원대로 떨어졌다. 특히 10월 들어서는 지난 20일까지 1조4000억원대 수준에 그친다. 순발행액은 3조원 이상 마이너스(-) 상태다. 신규 발행액보다 만기 상환액이 훨씬 더 크다는 말이다. 시장에서 차환이 용이하지 않다는 말이다.
한전채와 같이 우량 채권으로 회사채 시장 자금을 끌어갔던 시중은행들의 은행채는 발행이 멈췄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4일과 26일 은행채 발행액은 0원이다. 지난 달 월별 발행액 기준 최대치인 25조8800억원을 기록했고, 이달 들어 지난주까지 하루 평균 은행채 발행액은 1조3500억원에 달했던 것이 정부 대책 발표 이후 뚝 끊긴 것이다.
정부는 50조원+α(알파) 유동성 공급프로그램을 발표하면서 은행채 발행에 대한 조치도 내놓았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비율 상향조정 조치를 6개월 미루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LCR은 국제결제은행(BIS)의 유동성비율 규제로, '30일간 순 현금 유출액 대비 고유동성 자산 비율'을 말한다. 이 비율이 높아질수록 은행들도 자금 조달 규모를 확대해야 하는데 이를 유지해 줌으로써 은행채를 더 발행한 동력이 없어진 것이다. 금융위가 LCR 규제를 현행 수준(92.5%)으로 유지해주겠다고 밝히며, 이번 주 들어서 은행채 발행 동력이 사라진 것이다.
한전은 회사채 발행 여력을 거의 소진하고 있다. 한국전력공사법상 채권 발행 한도는 자본금과 적립금을 더한 금액의 두 배다. 한전이 추정하는 올해 회사채 발행 한도는 29조4000억원이다. 누적 회사채 발행액은 이미 이 한도를 두배 이상 상회한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가 한전의 유동성을 위해 한도를 늘릴 수 있다.
정대호 KB증권 연구원은 "과거 철도공사 한도부족시 2배에서 5배로 근거법 개정 사례 있다"고 전했다. 발행은 내년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정 연구원은 "한전채와 같은 특수·은행채 발행 확대가 회사채 시장 회복을 지연시킨다"고 설명했다.
한전채가 아니더라도 채권 투자심리가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게 채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채권운용업계 관계자는 "일반 기업의 회사채 에 비해 한전채가 인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한전채도 다 팔리지 않는 상황"이라면서 "높은 이자부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채권 발행기관들이 다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듯 한전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한전이 회사채 시장을 싹쓸이 하면서 다른 기업들이 회사채를 발행하지 못하고 있다"며 "산업은행이 한시적으로 한전에 대출해 회사채 시장의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