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애 ICT과학부장
미국 의회의 초당적 합의를 거쳐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9일(현지시간) 서명한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일명 '반도체법'이 가져올 후폭풍을 계산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싱크탱크가 풀가동 중이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가 '위기'를 부르짖으며 앞뒤 돌아보지 않고 혼자 달려 나가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800쪽 분량의 방대한 법안 조항 곳곳에는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법의 핵심은 전 세계 산업의 '쌀'이자 혁신의 엔진 역할을 하는 반도체를 미국 내에서 생산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내 반도체 연구개발과 생산시설 확대에 총 527억 달러(약 69조원)을 지원하고, 220억 달러(약 29조원)를 들여 반도체 관련 투자 기업에 세금공제를 해주는 내용이 포함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법에 서명하면서 "미국이 돌아왔다"고 외쳤다. 그러면서 "앞으로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미국에서 열릴 것이다. 우리의 경제와 일자리, 국가 안보를 위해 다시 미국에서 반도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2025년을 전후해 세계 반도체 산업이 구조적 전환기를 맞을 것으로 분석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것이 반도체 뒤에 따라붙은 '과학' 부분이다. 이 법은 과학기술과 국가 R&D에 대한 미국의 접근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반도체과학법은 반도체 내용을 담은 1부, 헌법재판소 내용을 3부 외에 연구·혁신 내용을 2부에 담고, 에너지, 국제표준, 기초과학, 국가전략기술, 바이오경제, 우주항공 투자전략을 망라했다.

먼저 에너지부(DOE) 과학실의 2022년 예산을 작년보다 50%나 늘렸다. 기후변화와 전쟁이 불러온 전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를 과학기술로 극복하겠다는 복안이다. DOE의 R&D 투자는 재료과학, 화학, 생물학 등 기초연구부터 핵융합, 핵물리학, 입자가속기, 첨단 컴퓨팅 연구를 아우른다. DOE는 또한 산하에 에너지안보혁신재단을 설립, 미래 에너지 어려움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 개발과 상업화를 지원하는 기금도 조성하기로 했다.

에너지를 포함해 인공지능, 바이오, 우주항공 등을 포함한 기초과학 연구와 인력양성, 인프라 확충에는 반도체에 들이는 돈보다 훨씬 큰 2000억 달러(약 260조원)가 투입된다. 특히 한국연구재단과 비슷한 기초연구·기초과학 지원 기관인 국립과학재단(NSF) 산하에 '기술혁신국'을 신설해 사회적 문제를 풀기 위한 중개연구와 혁신 기술 테스트베드 운용에 집중 투자키로 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기술의 씨앗을 뿌리는 기초연구뿐 아니라 이미 싹이 튼 연구를 현장과 빠르게 연결해서 사회·경제적 가치와 연결하겠다는 것. NSF는 아울러 인공지능, 고성능컴퓨팅(반도체), 양자기술, 로봇, 자연재해 예방, 첨단통신, 바이오, 데이터·분산원장, 첨단에너지, 첨단소재를 10대 핵심 기술로 정하고 투자를 집중키로 했다.

미국 정부는 또한 중국 등 경쟁국에 비해 기술 경쟁력과 경제력, 군사력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과학기술전략'과 '경제안보 및 과학·연구·혁신전략'을 입안하기로 했다. 특히 경제안보 및 과학·연구·혁신전략은 대통령과 과학기술정책국(OSTP),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 국가안보위원회, 국가경제위원회 등 범국가적 컨트롤타워 조직이 대거 참여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세계 일등 국가가 천문학적 투자를 쏟아 부으며 전속력으로 달리기 위해 몸을 풀고 있다. 가만히 지켜보다가는 그동안 애써 쌓아온 것들이 모래성이 될 판이다. 국가 R&D 30조 시대라고 하지만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현장으로 연결하는 절실함이 바탕이 안 되면 소용이 없다. 씨뿌리기식 기초연구도 중요하지만 연구성과를 시장·현장과 연결하는 중개연구, 국가·사회·경제적으로 꼭 필요한 전략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임무중심형 연구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다.

통일벼, 우리별, CDMA, TDX(시분할교환기)….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과거 절실함으로 똘똘 뭉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혁신가들의 도전 덕분에 가능했다. 1990년대 'G7(선도기술개발사업)', 2000년대 '21세기 프론티어'를 이을 대형 국가 R&D 사업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되면 과학기술 전문가를 대통령실 최고위직에 배치하고, 정부와 민간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국가 혁신 거버넌스 체계를 만들겠다던 초심도 돌아볼 때다. ICT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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