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 방 제대로 먹었다. 오랜 동맹국이자 최대 산유국 사우디에서 벌어진 일이다. 세계적인 고유가를 잠재우기 위해 사우디의 화끈한 협조가 필요했다. 하지만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는 바이든 면전에서 그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석유 증산'이라는 성과물은 없었다. 바이든은 빈손으로 귀국했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회동은 거센 후폭풍을 가져왔다. 유가는 아랑곳없이 상승페달을 밟고 있다. 한마디로 '바이든의 굴욕'이다. 바이든이 '왕따 국가'로 만들겠다던 사우디에서 되레 '왕따'당한 격이다. 이는 미국의 영향력 퇴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불릴 만하다.
그렇다면 인권을 중시하던 바이든이 왜 성과를 예단하기 힘든 사우디 방문을 결정했을까. 그동안 바이든 행정부는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이었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지난 2018년 튀르키예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사우디 요원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것과 관련해 MBS를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하면서 문제 제기를 해왔다. 바이든은 대선후보 시절인 지난 2019년 "그들(사우디)이 대가를 치르도록 하고 따돌림받는 신세(pariah)로 만들겠다"고 공언했었다.
이랬던 인권 옹호자 바이든이 지난 15일 취임 후 처음으로 사우디를 방문해 36세의 권력자 MBS를 만났다. 그는 아버지 사란 국왕이 군림하고 있지만 86세로 연로해 모든 분야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한다. 그래서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사실 바이든의 사우디 방문 결정은 어렵게 성사됐다. 국제유가 안정과 중동 내 이란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선 사우디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며 참모들이 바이든을 설득한 결과다. 또한 이스라엘의 의중도 영향을 미쳤다. 이스라엘은 사우디와의 관계를 정상화하려는데 바이든의 지원이 절실했다. 바이든은 원칙보다는 실리를 택했다.
바이든이 MBS를 만나 주먹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했다. 미국 내 대표적인 좌파 정치인인 무소속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우리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믿지만 사우디가 이 중 어떤 것을 믿는지 모르겠다. 이 같은 독재국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혹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바이든의 사우디 방문이 꼭 비난받을 일일까 싶다. 미국의 입장에선 러시아와 중국의 세력 확대 저지가 급선무였다. 바이든은 이 관점에서 문제의 퍼즐을 맞추고자 했다. 좀 불쾌하더라도, 불편하더라도 MBS를 만나 석유증산 약속을 얻어내는 게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란 판단때문이었다.
유가상승은 에너지 수익을 불려 러시아가 더욱 쾌재를 부를 일이다. 이 와중에 세계에서 천연가스 매장량이 가장 많은 러시아는 이란과 400억 달러(약 52조3000억원) 규모 천연가스 개발·투자 관련 협약에 서명하며 서방 제재에 대항한 '에너지 연대' 강화에 나섰다. 다급해진 바이든은 현실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세계는 인플레이션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 각국은 '빅스텝'을 밟고 있다. 기준금리를 평소 인상 폭의 2배 이상으로 올리는 게 대세가 됐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5월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린 데 이어 6월에 0.75%포인트나 인상하는 초강수를 뒀다. 10년 전 세계 최초로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덴마크도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리며 빅스텝에 합류했다.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40여 년만에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지난달 물가는 9.1%나 올랐다. 에너지가격 상승이 최대 요인이다. 그 심각성이 어느 정도일까. 미국인 10명 중 6명은 먹고 사는 데 급여 전부를 모조리 쓰고 있는 현실이다. 심지어 연봉 25만 달러(약 3억2000만원)가 넘는 고소득자 중 30%는 다음 월급을 받기 전까지 직전 월급을 다 지출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미국인들의 삶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는 신호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 상황을 볼 때, 바이든이 꺼내들 경제해법 카드가 마땅치 않다. 오죽했으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도 인플레이션에 대한 자신의 예측이 틀렸다고 인정했을까.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져온 불확실성은 바이든의 내일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