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高 공포'에 청주공장 증설 보류 450조 투자선언 삼성, 시기 조정 LG엔솔, 美 배터리 공장 재검토 애플·MS도 사업축소·인원 감축
국내 대기업들의 투자 기상도가 흐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직후인 지난 5월말 삼성 SK 현대차 등 주요 대기업들이 향후 5년간 무려 1000조원 이상을 투자하겠다며 장미빛 플랜을 발표하던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고물가·고환율·고금리의 '3고(高)' 공포가 엄습해 수요위축이란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속 경기침체) 싸이클에 진입하자 기업들이 투자의 주판알을 새로 튕기고 있다. 대표적으로 SK하이닉스와 LG에너지솔루션 등은 예정했던 투자를 미루고 비상·긴축 경영 에 돌입했다. 재계 1위인 삼성전자도 투자시점을 재조정할 지 를 고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투자 위축이 확산되면 부품·장비 등을 만드는 뿌리산업 생태계는 흔들리게 된다. 후방산업의 위기는 일자리 감소와 소비 침체를 더 가중시켜 경기침체를 가속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19일 산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달 29일 이사회를 열고 청주공장 증설 안건을 의결하려고 했으나, 논의 끝에 결국 최종 결정을 보류했다. SK하이닉스는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내 43만3000여㎡ 부지에 약 4조3000억원을 투자해 메모리반도체를 만드는 신규 반도체 공장(M17)을 증설할 계획이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내년 초 착공해 2025년 완공돼야 하지만, 이사회의 보류 결정에 따라 착공은 연기될 가능성이 커졌다. SK하이닉스 측은 향후 공장 증설 일정 등에 대해 "결정된 바 없다"고 답했다.
5년 간 총 450조원의 초대형 투자계획을 내놓은 삼성 역시 투자시점을 조율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전체 투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반도체 사업의 경우 연내 테스트 가동을 준비중인 경기 평택캠퍼스 내 세 번째 반도체 생산라인(P3) 등 기존 투자는 계속하지만 추가 증설(P4) 시점에 대해서는 시점을 늦추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중국을 제외한 전기차 배터리 세계 시장 1위인 LG에너지솔루션도 미국에 1조7000억원을 들여 배터리 단독공장을 짓기로 한 투자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한 상태다. 합작이나 펀딩 등으로 외부 자금을 확보해 현금 부담을 덜면서 증설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회사측은 전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대기업들은 새 정부 출범 직후 임기 동안 총 1000조원이 넘는 중장기 투자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재계에서는 이들 기업이 투자계획을 줄이진 않겠지만, 투자 시점은 다소 늦출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기업들이 투자를 주저하는 이유로는 수요 부진과 환율 부담 등이 꼽힌다. 삼성전자의 경우 미국 내 파운드리 공장 건설부지를 확정할 당시 내놓았던 170억 달러 투자 계획이 한화 기준으로 하면 약 2조원 가량 더 늘었다. 작년 11월 환율로 계산하면 약 20조원 규모였는데 현 시점에서는 22조원이 됐다.
여기에 수요 위축도 작용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올해 3분기 D램 가격이 전분기 대비 최대 10%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배럴 당 100달러 선에서 등락을 반복하는 국제유가에 최근 하향 안정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예년보다 높은 철광석 등 주요 원재료 가격 역시 제조업체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14일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기자들과 만나 "작년에 세웠던 투자계획은 당연히 바뀔 가능성이 존재한다"며 "원재료 부분이 너무 많이 올랐기 때문에 원래 투자대로 하기에는 계획이 잘 안 맞는다"고 말한 바 있다.
대기업들의 투자 위축은 국내 기업만의 일이 아니다. 18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세계 시가총액 1위인 미국 애플은 경기침체 가능성에 대비해 내년 일부 사업부의 고용과 지출 증가 속도를 줄이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 블룸버그는 이 사안을 잘 아는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애플이 내년에 일부 사업 부문의 연구개발(R&D)·채용 예산을 예상보다 적게 책정하기로 했다고 전했다.마이크로소프트(MS)도 최근 전체 직원의 1% 수준인 1800여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상황은 부품·소재 기업의 생존을 위협할 것으로 우려된다. 이날 애플의 긴축경영 소식이 전해지자 아이폰의 주요 부품 공급 한국업체인 LG이노텍의 주가는 4.78%나 빠졌다.
한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기업산업자문위원회인 BIAC(Business at OECD)의 경제정책조사 결과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응답업체들 가운데 자국의 기업투자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 비율은 지난해 95%에서 올해 72%로 23%포인트(p) 하락했다. 반면 투자가 감소할 것이라고 응답은 같은 기간 2%에서 23%로 21%p나 상승했다. 박정일기자 comja77@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