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백성이 경작하는 땅 주인이 혹 3~4가(家)이거나 혹 7~8가(家)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조(租)를 바치면 부족하고 돈을 빌려도 이자가 늘어나기만 합니다. 어떻게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기를 수 있겠습니까?"(고려사 열전 이색)

고려말, 이색이 왕에게 올린 상소문의 일부다. 당시에는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신법파 사대부와 고려의 왕정을 복구하려는 구법파 사대부의 권력투쟁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양측은 불교 존속 문제와 외교정책 방향, 관료제 운영방안, 정치체제 개혁, 토지 제도 정책 등을 두고 계속 대립했다. 이 과정에서 국왕이 연달아 폐위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세력이 반대세력을 숙청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등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격변기이자 대혼란기였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민생에 대한 끈 만큼은 놓지 않았다. 사료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이색의 문집인 '목은집', 정도전의 '삼봉집' 등을 보면, 구법파와 신법파 모두 경쟁적으로 백성들이 처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진단한 뒤, 구휼제도를 제시하는 상소들을 올렸다.

특히 토지겸병과 불법 침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법파와 신법파가 다른 개혁론을 제시하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구법파는 한 토지에 여러 명의 전주(田主, 수조권자)가 있는 것을 문제로 보고, 토지문서에 의거해 '일전일주'(一田一主, 한 토지에 한 명의 주인)의 원칙을 확립할 것을 제안했다.

반면 신법파는 사전(私田)이 세습 토지가 되면서 직역부담자가 수조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문제로 보고, 기존 사전을 모두 없애고 직역 부담 여부에 따라 새로 분배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두 정치세력 모두 민생 현안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안정화를 위한 개선안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 국회는 어떠한가. 고물가·고환율·고금리 등 이른바 '3중고'로 민생경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데, 여야는 자리다툼만 할 뿐이다. 하반기 국회는 여야 이견으로 국회의장단만 선출한 채 원구성도 못하고 있다. 상임위원회가 없으니 민생 현안 법안 처리와 예산 지원 등의 길은 막혀있다. 지난 13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확인한 결과,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법안은 1만1423건이다.

각 정당 상황을 살펴보면 더 참담하다. 민생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모습은 실종된 지 오래다. 여야 의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오로지 '당권'이다. 국정에 책임이 있는 여당 국민의힘의 경우 성 상납 의혹으로 이준석 대표가 '당원권 6개월 정지' 처분을 받은 뒤, 당권 투쟁이 더 본격화되는 분위기다.

옛 국민의당 대표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지낸 안철수 의원과 원내대표를 지낸 김기현 의원은 토론회를 열면서 세(勢)결집에 나서고 있다. 권성동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지난 11일 최고위원회·선수별 의원모임·의원총회에서 직무대행 체제를 추인 받은 뒤, 당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행보를 넓히고 있다. 나경원 전 의원도 한 라디오를 통해 당대표 도전을 시사했고, 주호영 의원이나 윤상현 의원도 당대표 출마를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정·대에서 논의됐던 유류세 인하나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 확대, 물가 안정화 등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도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며 유류세 인하 등 민생 챙기기에 나서고 있으나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평가다.

거대야당인 더불어민주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선과 지선에 연달아 패배했는데도 전임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실정에 대한 반성과 대안 마련은 찾아보기 어렵다. 더구나 전당대회까지 앞둔 터라 당권투쟁 양상은 국민의힘보다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친명(친이재명)계와 반명(반이재명)계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당대회 룰을 설정하기 위해 최근까지 계속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이제는 당 지도부를 특정 계파가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최고위원 출마 러시를 벌이고 있다.

당내 '세대교체론' 바람에 힘입어 당권 도전을 선언한 97세대(70년대생·90년대 학번)는 민생 현장에 대한 얘기보다 '당내 헤게모니 변화'에 대한 주장만 쏟아내고 있다. 지난 10일부터 본격적인 당권 도전 행보에 나선 이재명 의원도 페이스북을 통해 민생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메시지만 내는 정도다.

심각한 경제 위기 국면에 적절한 해법을 제시해야 할 정치권이 오히려 '민생의 짐'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쯤 되면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정신 좀 차려야 하지 않을까. 지금보다 정치적 격변이 더 심했던 고려말도 이렇진 않았다.

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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