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위는 새 정부가 안정적으로 출범하고 순항할 수 있도록 항로를 개척해서 새 정부가 나아갈 항해지도를 그려내는 것이다"
안철수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 출범 한 달을 맞아 지난 18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인수위의 역할론이다. 인수위가 어렵게 항해 지도를 그려낸다고 하는데도, 언론에선 "국정의 큰 그림이 없다" "국가 비전 제시가 미흡하다"고 비판 일색이었다. 그것은 국민이 항해의 '목적지(국가 비전)'를 먼저 알려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배가 나가야 할 새로운 방향과 목적지의 좌표가, 세부 국정과제들 보다 우선이라는 이야기다.
대통령직을 인수할 윤석열 당선인이 항해에서 선장과 같은 존재인데, 국민이 느끼기에는 아직 항해의 목적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항해에 나선 선장이 선원들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고, 배가 왜 여기에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선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배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것이다.
윤 당선인은, 선거에서 '공정과 상식(의 회복)'을 슬로건으로 내걸었고 이 슬로건은 많은 지지자들로부터 공감을 받았다. 공정과 상식은 모든 국가의 지도자들이 추구하는 목적이고, 우리나라의 경우, 여전히 특권의 타파와 상식의 회복이 필요한 사건들이 많아 더 기본적인 가치이다.
'비전'은 이러한 '기본 가치(핵심이념)'와 함께 '성취해야 할 목표(비전화된 미래)'라는 두 기둥으로 구성이 된다. 공정과 상식은, 비전의 또 하나의 기둥인 '비전화 된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공정과 상식'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셈이다. 그래서, 안 위원장의 기자간담회 설명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인수위에 국정의 큰 그림, 국가 비전을 명료하게 제시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작은 조직이든, 국가든 지도자의 몫은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 제시하는 일이다. 많은 기업이나 단체는 소개 자료에 비전을 밝히고, 사무실 액자 속에 그것을 담아 걸어놓고 있다. 한 예로 포드 자동차의 설립자 헨리 포드는 '자동차의 대중화'를,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최고 경영자 잭 웰치는 '우리가 속한 모든 시장에서 1,2위가 된다'는 비전을 내걸었다.
좋은 비전은 마치 여행을 하는 데 북극성 같은 역할을 하여 여행자들이 방향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이창준, 리더쉽 패스파인더, 학이시습).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도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국민들과 공유할 수 있게 노력하였다. 외환위기의 와중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IT(정보기술) 정보화 강국'의 비전을 내걸었고 이를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을 통해 국민들의 마음 속에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국민들은 (일본 등 보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에선 앞서갈 수 있겠다는 용기를 갖고 정보화 추진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적으로 정보화 강국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연두교서에서 '수출을 경제활동의 생명으로 삼겠다'며 '수출입국(수출로 나라를 세운다)'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는 '수출이 아니면 죽음 뿐,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아라'라는 어록을 남겼다. 당시 종합상사 맨들은 자신의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세계시장을 무대로 밤낮 없이 뛰었고, 눈부신 경제성장이 눈 앞에 펼쳐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 '창조경제'라는 비전을 발표했다가 그 뜻이 모호하다는 비난에 부닥쳐 곤혹스러워 하기도 했다. 당시에, '창조 경제'를 "예전에 없던 기술·제품의 '창조'를 통해 일자리를 성장시키는 '경제' 정책"이라고, 그 단어로 풀어서 설명해 주었더라면, 혼란이 없이 비전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현 인수위는 새 정부의 최상위 국정 비전과 취임식 슬로건으로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를 검토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되었다.
국가 비전은, 앞의 '창조 경제'의 예 처럼, '디지털 플랫폼 정부' '과학경제강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 같은 추상적 명사로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새로운 국민의 나라'라는 슬로건을 보고선 무엇인지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고 마음에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전을 접한 국민이 자신도 어떤 행동을 취해야겠다고 스스로 마음먹게 하려면, 전문용어이거나 딱딱한 명사 보다는, 마음을 움직일 동사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1970년 대 가족계획의 표어인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처럼, 자식을 잘 기르고 싶은 부모의 욕망을 자극할 수 있다면 국민의 행동을 더 잘 이끌어낼 것이다.
비전(슬로건)은 진정으로 국민의 열망을 담아내고, 실현 가능하다고 믿어지게 국가의 강점 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야 좋을 것이다.
인수위는,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이 기존의 진영 갈등을 넘어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국가 재도약의 담대한 비전을 제시해 주길 바란다. 이 비전이 있어야 대통령 취임사도 힘 있고 빛을 발할 수 있게 작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