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당선인은 당선 제1성으로 통합의 정치를 국민에게 약속했다. 보수·진보로 극심하게 분열되었던 국민과 여야 정쟁을 녹여낼 통합의 정치를 모두 갈망하고 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통합의 정치에 대한 요구가 높지만 대선 이후에도 여야간에 대립이 지속되고 국민간의 갈등도 계속되는 등 현실은 매우 어렵다. 우리에게 통합의 정치를 구현한 선례가 있었을까.
조선 효종 때 김육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대동법 시행을 통해 통합의 정치 리더십 진수를 보여준 관료였다. 대동법은 그 시작부터 완료까지 100년이 걸린 조선시대 최대의 개혁이었는데 이를 추진한 핵심인물이 바로 김육이다. 그는 그 어려운 개혁과제를 추진하면서 정책 논쟁과정을 통해 오히려 당파와 계층을 넘어선 통합의 정치를 구현해 낸 특출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김육평전'을 펴낸 고려대 이헌창 교수는 효종과 김육의 군신공치가 조선의 가장 성공한 사례라고 평가하면서 김육의 통합 정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대동법 이전 조선의 공납제는 지역의 토산물을 현물로 납부하게 하는 조세제도인데 현지에서 생산되는 갖가지 농산물, 수산물, 임산물, 수공업제품을 그대로 징수하여 서울로 실어나르게 함으로써 조세의 형평성이나 효율성 차원에서 매우 문제가 많았다. 도로가 부실하고 운송수단도 미비된 전 근대시대에 예를 들어 산 꿩이나 노루, 해산물 등을 손상없이 온전히 서울로 운송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고 번거로운 일인가. 공납제는 지역별로 할당된 토산품 물량을 토지 면적을 따지지 않고 주로 농가 가구별로 분담시키므로 가난한 농민에게 더 부담이 가중되는 역진적인 제도였다. 공납제 개정 논의가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이익집단의 반대로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토산물의 현물 납부 방식을 바꿔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하되 쌀로 통일하여 납부하게 하자는 제도가 대동법이다. 이런 제도개혁에는 토지를 많이 가진 부자들과 공물납부 과정에서 중간 이득을 취해 왔던 향리와 공납업자 등 기득권 이익집단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토지가 많은 부자들은 주로 양반 사대부들로서 대동법을 시행하려면 그들의 지지가 절실한데 기득권을 지키려는 반대뿐만 아니라 당파적인 이해관계까지 반영되어 당파에 따라 입장이 달라 정책 조정이 더욱 복잡하고 어려웠다.
김육은 당파를 초월하여 대화하며 다른 사람의 이론과 정책, 외국의 문물을 열린 마음으로 두루 수용하는 개방적, 통합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본인이 서인 가문에서 태어나 주로 서인들과 교류를 했지만 남인 관료, 학자들도 존중하고 토론하며 정책적 협력관계를 맺었다. 대동법에 반대한 핵심 인물들이 주로 서인 사대부인 송시열, 김집과 그 제자들인데 이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며 반대여론을 약화시키고 설득했다. 서로 의견이 달라 격렬한 정책논쟁을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제도의 원활한 정착을 위해 정책 계승자를 발탁, 양성하여 관료의 정책역량을 강화하는데도 노력했다.
김육은 최고의 국정현안인 대동법을 논의하는 어전회의에서 수시로 토론하며 의견조정을 시도하고 인신공격과 반대여론이 부각되어 난관에 부딪히면 바로 사직의 상소를 올려 효종의 신임을 묻고 결단을 촉구했다. 충청도 대동법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8차례 사직의 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번번이 효종은 김육을 신임하며 사직을 만류했다. 당론에 따라 반대하는 유생, 관료, 이익집단들의 상소가 빗발쳐도 김육은 대동법이 민생의 핵심과제라는 소신을 꿋꿋하게 견지하며 반대파와 토론하면서 임금을 설득했다.
이익집단의 반발에도 혜택을 보는 대다수의 농민들은 대동법을 열렬히 환영했지만 최고의 국정과제는 지도자의 결단과 통합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하가 역량을 발휘하도록 굳게 신뢰하고 끝까지 지원한 통치자 효종과 책임 관료 김육의 이런 신뢰관계를 통해 대동법 시행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결국 국정개혁의 성공여부는 통치자와 핵심 관료가 이익집단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농민의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학자, 관료 등을 두루 통합하는 정치력, 소통의 리더십 발휘에 달려 있다는 교훈이다. 당쟁이 치열했던 시대에도 가능했던 통합의 정치가 새 정부에서 잘 구현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