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화 논설실장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서 기마민족의 유전자가 느껴진다. 속도감이다. 윤 당선인은 청와대 회동에서 재차 대통령 집무실 이전 의지를 밝히며 집무실 이전에 협조해줄 것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이렇게 빨리 추진되리라 예상한 국민은 별로 없었다. 허를 찌르는 속전속결이다. 낙마만 않는다면 신속 과감한 결정이 나쁠 건 전혀 없다. 최근 시나브로 옅어져온 한국인의 '빨리빨리 기질'을 윤 당선인에게서 발견해 반갑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살게 된 데는 뭐든 빨리빨리 해치우려는 국민 습성이 작용했다. 90년대 밀어닥친 ICT 혁명과 기마민족의 기동성이 만나 세계 최강 ICT 국가를 일궜다. 그러나 스스로 그 습성을 근거 없이 흠집 내면서 속도가 떨어졌고 거꾸로 가기 시작했다. 공공과 민간의 혁신 속도가 각종 세계 순위에서 하락 중이다. 이런 한국인의 모습을 보면서 한 외국 학자는 한국인이 어느 국민도 갖지 못한 특장을 버리는 자해(自害)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술패권시대 하루 뒤지면 한 달 뒤처지고 한 달 뒤쳐지면 1년, 1년 뒤처지면 10년을 밀린다. 비단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심지어 문화예술과 스포츠분야도 마찬가지다. 한통속 세계는 완전 오픈된 무대에서 계급장 떼고 경쟁한다. '쿨'한 문화적 밈은 실시간으로 확산한다.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건 한국인의 빠른 기동성이 발휘돼서다. 반면, 한국의 올림픽 성적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엔 고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잘 차려진 상 받듯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하려 한다면 윤 당선인 말마따나 영영 이전 못 할지 모른다. 집수리는 이사할 때 하는 것처럼 집무실 이전도 대통령 이취임기가 적기다. 무리는 따르지만 결단해야 할 일이다. 청와대의 공원화와 대통령 집무실 삼각지 이전은 생각보다도 의미가 심대하다. 5000만 국민 뇌리에 '청와대' 하면 떠오르는 그 이미지가 뇌리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해보라. 권좌의 상징인 청와대가 북악산 산행 길에 잠시 들르는 국민 휴게실이 된다고 생각해보라.

윤 당선인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다. 그도 사람인데 엊그제 청와대 녹지원 수려한 경관을 보며 어찌 탐나지 않았겠나. "꽃이 참 아름답다"고 했다. 그 좋은 경치를 권력층만 누릴 게 아니라 온 국민이 누리게 하겠다는데 웬 딴진가. 청와대를 포기하는 건 권위와 힘의 상징인 북좌남면(北座南面)을 않겠다는 것으로 조선 이래 600년 경복궁 시대를 마감하고 용산으로 이전하는 '작은 천도(遷都)'의 의미도 있다.

하늘을 의미하는 북악산을 등지고 남쪽(국민)을 굽어보는 청와대의 북좌남면은 권위적 수직적 단선적 정치문화를 상징한다. 대통령 집무실을 사대문안에서 용산으로 옮기는 건 스스로 중심을 내어주고 변경으로 내려앉겠다는 겸양의 리더십이기도 하다. 북좌남면을 마다하고 저잣거리 시장으로 나온 대통령 집무실은 탈권위, 수평적, 다원적 정치문화를 열 무대가 될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말하지만, 우리 헌법이 제왕적 권력을 주진 않았다. 대통령들이 권력을 자의적으로 사용해온 탓이다. 대통령이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하여 의식을 지배하는 공간을 바꾸겠다는 건 타당하다. 무슨 환경순응론자니 공간결정론자니 하며 어깃장 놓는 건 설득력이 없다. 괘념할 필요 없다. 상징조작이 필수불가결한 정치에서 물리적 가시적 공간이 지닌 메시지를 윤 당선인은 잘 활용하고 있다.

사족 하나, 윤 당선인은 소위 국정농단 특검 팀장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있을 때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자유민주 인사 200여명을 무리하게 수사하거나 재판에 넘겼다. 그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도 있다. 그러나 사과한 적 없다. 직책에 충실했다고만 했다. 집무실 이전을 전격적으로 결정한 그의 면모와 어울리지 않는다. 윤 당선인은 곧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날 계획이라고 한다. 그때 자유 민주 국민들의 가슴에 맺힌 앙금을 풀어줬으면 한다. 그래야 그의 속도 정치, 속전속결 마상(馬上) 리더십이 거침 없을 것이다.

이규화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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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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