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위 초반부터 "거취 정하라" 임기 남은 기관장들도 좌불안석 오찬취소 사면·인사권 원인 부각 "공정한 평가로 옥석가리기 해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이 문재인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공기업 등의 기관장들에게 '스스로 거취를 정하라'며 새정부 출범 전부터 압박하고 있다. 임기가 상당 기간 남아 있는 기관장들마저도 정권교체와 함께 물갈이를 당하는 것 아니냐며, '좌불안석'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정식 출범도 하기 전에 법적 임기가 보장된 기관장들의 퇴임을 요구하는 것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윤 당선인이 3·9대선 과정에서 약속했던 통합정부와 국민통합 기조에 어긋나는 행태라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은 16일 예정했던 오찬 회동을 불과 4시간 앞둔 오전 8시쯤 전격 취소했다.
청와대와 당선인 측 모두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면에 대한 이견과 함께 인사권 갈등이 주요 원인으로 부각됐다. 윤 당선인의 최측근인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과 권영세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잇따라 문재인 정부 인사들을 상대로 거취 압박에 나선 것과 무관치 않다.
권 의원은 지난 15일 김오수 검찰총장을 향해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김 총장의 퇴진을 주장했다.
또 권 인수위 부위원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정치적으로 임명된 직원들은 스스로 거취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며 사실상 사퇴를 압박했다. 국민의힘 측은 문재인 정부가 정권 말 청와대 출신 등 낙하산 인사를 요직에 알박기 하는 것이 문제라는 입장이다.
퇴임 1순위로 거론된 김 총장은 지난해 6월 취임했기 때문에 잔여 임기가 내년 5월까지로 1년 2개월 가량 남아 있다. 김 총장은 이날 "법과 원칙에 따르겠다"면서 퇴진 요구를 거부했다.
당선인 측의 퇴진 압박이 공직사회 전반에 미친 파장은 상당하다. 공공기관이든 공기업이든 기관장들의 남은 임기와 별개로 물갈이 대상에 포함될까 좌불안석에 놓인 탓이다. 전례를 살펴보면 장관들의 경우 대부분 새 정부가 들어서면 교체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라 해도 산하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은 상대적으로 안전지대였다. 하지만 당선인 측의 거취 압박이 광범위하게 확산할 경우 이들도 임기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생기고 있다. 공기업 중에서는 다음달 임기 만료를 앞둔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의 연임 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정 사장은 문재인 정부 초기 월성원전 1호기 조기 폐쇄 등 '탈원전' 정책을 주도해왔다.
임해종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은 임기가 1년 넘게 남았지만, 취임 전부터 '캠코더(문재인 대통령 선거 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 논란이 일었던 만큼 새 정부 출범 후 사퇴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임 사장은 민주당 지역위원장을 지냈지만, 전략공천으로 총선에 불출마한 뒤 지금의 자리에 내정됐다.
국책연구원장 중에서는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언급된다. 홍 원장은 문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을 설계한 인물로, 임기 말 국책연구원장에 임명돼 임기가 2024년까지 이어진다.
오는 31일 임기가 끝나는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과 박원석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은 연임 충족 조건을 갖췄음에도 이사회 구성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연임 결정이 새 정부 몫으로 넘어갈 공산이 커졌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선임된 박 원장은 새정부의 탈원전 폐지 방침에 따라 연임이 불투명해졌다. 당선인 측 친원전 인사들이 대거 원자력연구원장을 노릴 것으로 보여 안팎에서 박 원장의 연임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과학계에선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기관장을 대상으로 일괄 사표를 받거나, 사퇴를 종용하는 일들이 벌어질 지 경계하고 있다. 과거 MB정부 때 노무현 정부에서 선임된 기관장에게 사퇴 압박을 했던 전례가 있어 새 정부가 이 같은 일을 재현할 지 과학계는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더욱이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고 현장을 잘 알지 못하는 '폴리페서'들이 낙하산 인사를 통해 선임되는 것에 대해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 관계자는 "과학계는 다른 공기업, 공공기관의 기관장과 달리 특수성과 전문성을 갖고 있는 인사에 있어 정치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전 정부 사람이라고 보장돼 있는 임기를 무시하라고 무작정 나가라고 하는 악습은 이어져선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ICT(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는 민주당 디지털소통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문용식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장이 다음달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어 교체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차기 보험연구원장 선임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연기됐다. 공식적으로는 코로나19 상황에 대비한 차원이라고 하지만, 업계에서는 인수위 보고 시기를 감안해 금융위원회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박상철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당선인이 약속했던 공정과 원칙에 따른 상식적 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임기가 보장된 기관장에 거취 압박을 하는 것은 월권이고 과도한 요구"라며 "문재인 정부도 차기 정부에 양보할 인사는 양보하고, 새 정부 측도 기다릴 것은 기다리면서 서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통합정부의 출발"이라고 말했다.
공공기관 관계자는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판례를 보면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도 기관장들 임기를 보장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라며 "새 정부의 국정철학에 공공기관이 발을 맞춰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관장이 바뀐다면 제대로 된 일을 하기 어렵다. 공정한 평가를 통해 옥석 가리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준기·김미경·은진·은진·김수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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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6일 안철수 인수위원장, 권영세 인수위 부위원장, 원희룡 기획위원장 등과 함께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을 나와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연합뉴스